국내 주요 기업의 현금성 자산이 코로나19 팬데믹 이전보다 크게 늘어났다. 경제 불확실성에 대비하고, 미래 성장엔진에 투자할 ‘실탄’을 확보하는 차원으로 볼 수 있다. 세계경제는 미·중 무역갈등을 거치면서 급격하게 ‘블록경제’로 옮겨가는 분위기다. 여기에 글로벌 인플레이션 우려, 공급망 위기, 우크라이나 사태가 겹치면서 불안감이 커진 기업들은 ‘곳간 채우기’에 나선 것이다. 다만 쌓아두기만 할 뿐, 실제 투자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는 지적이 제기된다.
14일 금융감독원 전자공시에서 유가증권시장의 시가총액 상위 20개 기업(금융사·공기업 제외)을 분석한 결과, 18개 기업의 현금 및 현금성 자산 보유액이 코로나19 이전인 2019년 대비 증가한 것으로 조사됐다. 대표적으로 삼성전자 현금 보유액은 29조3825억원에서 39조314억원으로 32.8% 늘었다. 현대자동차는 9조8621억원에서 12조7955억원으로 29.7% 뛰었다. 반면 삼성물산은 2019년 2조7044억원에서 지난해 2조2545억원으로, SK텔레콤은 2019년 1조2708억원에서 지난해 8727억원으로 각각 줄었다.
기업들은 ‘실탄’ 확보에 채권 발행, 증자를 함께 활용했다. 지난해 일반 기업회사채 발행 물량은 46조7230억원에 달했고, 이 가운데 13조3760억원이 순발행 물량이었다. 기업들이 현금을 대규모로 쌓는 건 시장 변화, 신사업 전환에 대비하는 차원으로 풀이된다. 대표적으로 최근 시장 선점에 뛰어들면서 대형 투자계획을 발표하고 있는 배터리 업계와 반도체 업계에서 현금 보유 증가세가 발견된다. LG에너지솔루션의 현금성 자산은 2020년 1조2828억원에서 지난해 1조4931억원으로 늘었다. SK이노베이션은 2019년 2조1960억원에서 지난해 3조4238억원으로, 삼성SDI는 2019년 1조1562억원에서 지난해 2조3256으로 증가했다.
사업구조 전환을 위해 현금을 필요로 하는 사례도 있다. SK이노베이션은 배터리 사업을 하는 신설회사 SK온과 석유개발(E&P)사업을 담당하는 신설회사 SK어스온을 물적분할하면서 두 회사에 유동자산을 몰아줬다. 분할 전에 SK이노베이션 유동자산은 2조5000억원이었는데, 이 가운데 1조2400억원을 SK온에, 892억원을 SK어스온에 배분했다.
또한 인플레이션, 우크라이나 사태 등으로 경영 불확실성이 높아지는 상황도 기업에 ‘현금 모으기’를 부추긴다. 김대종 세종대 경영학부 교수는 “대외무역 불확실성이 커지면서 수출의존도가 높은 기업들이 위험 상황에 대비하는 차원에서 현금 확보를 늘리고 있다. 미국이 기준금리를 올리고 원·달러 환율이 더 오르는 등 당분간 수출 상황이 악화될 것으로 예상돼, 이에 대비하는 게 필요하다”고 분석했다.
그러나, 기업의 과도한 현금 보유를 우려하는 시선도 있다. 자금이 연구·개발(R&D) 등의 생산적인 곳에 쓰이지 않고 곳간에 묶여 있으면 아무런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국경제연구원이 지난해 말에 매출액 500대 기업 101곳을 대상으로 ‘2022년 투자계획’을 조사했더니, 응답기업의 절반 가량이 내년도 투자계획이 없거나(8.9%) 아직 계획을 세우지 못했다(40.6%)고 답했다. 올해 투자를 늘리지 않겠다고 한 기업들은 그 이유로 ‘경제 전망 불투명’(31.8%), ‘주요 투자 프로젝트 종료’(31.8%), ‘글로벌 공급망 재편에 따른 교역환경 악화’(19.7%)를 지목했다.
김지애 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