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사람은 영육 간에 복을 받고 간구하면 반드시 이루어지며, 모든 비극은 죄악 때문에 일어난다는 생각을 우리는 당연시합니다. 그러나 이것을 한 번쯤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틀린 생각은 아니지만, 여기에만 머물면 신앙의 더 깊은 차원으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시편의 시인들은 하나님께 울부짖습니다. 어찌하여 악한 자들은 평생 떵떵거리고 사는데 의로운 사람들은 그들에게 밟힌 채 먼지 속에서 고통을 겪게 내버려 두시느냐고. 신앙인들의 기대에 반하는 이 역설이 그들이 겪는 현실이었습니다. 이 고통에 찬 질문은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주님의 절규로까지 이어집니다.
신학을 배우던 젊은 시절 이 소설은 충격이었습니다. 나이 들어서도 몇 번을 더 읽었습니다. 노벨문학상 후보로 여러 번 거론된 일본 작가 엔도 슈사쿠의 대표작입니다. 17세기 천주교 박해가 극심했던 일본에 세 명의 서양인 신부가 선교를 위해 밀입국했다가 체포되어 배교를 강요당합니다. 배교는 간단합니다. 주님의 얼굴이 그려진 성화판을 밟는 것입니다.
그 판 밟기를 거부한 숱한 신자들이 고문을 받고 죽어가는 가운데, 이 소설의 근본적인 질문이 제기됩니다. 배교를 거부한 애꾸눈의 한 사내가 옥사 마당에서 단칼에 목이 잘립니다. 그의 피가 땅바닥에 물줄기처럼 꾸역꾸역 흘러나왔습니다. 한 신앙인이 믿음을 지키다 순교했는데, 한낮의 따가운 햇빛이나 마른 매미 소리는 그대로이고,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로드리고 신부는 하나님께 절규합니다. 저 애꾸눈 농민이 오직 하나님 때문에 죽었는데 왜 ‘침묵’하고 계시느냐고.
그는 자신에게 가해진 모든 고통은 견딜 수 있었으나, 자신이 배교할 때까지 신자들에게 가해지는 길고도 잔인한 고통 앞에서 무너집니다. 그는 성화판 앞에 섭니다. 평생을 가장 성스럽고 고귀하게 여기던 것을 밟아야 하는 고통에 전율하는 그에게 동판에 새겨진 그분이 말씀합니다.
“밟아도 좋다. 네 발의 아픔을 내가 제일 잘 알고 있다. 밟아도 좋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고, 너희의 아픔을 나누기 위해 십자가를 짊어진 것이다.” 이 소설의 백미입니다.
이것이 모든 신앙인의 고난에 답이 될 수는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소설은 현대 신학의 정수를 문학적으로 탁월하게 형상화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의 잔인한 파괴, 아우슈비츠로 대표되는 인간 살해의 참혹한 현장에서 하나님은 어디 계시느냐고 울부짖었던 신앙인들은 마침내 깨닫게 됩니다. 끝내 그분은 고통당하는 사람들과 같이 고통당하시고, 교수당하는 이들과 함께 형틀에 매달려 계시다는 각성입니다. 한국교회에 널리 알려진 위르겐 몰트만의 신학도, 십자가에 달리신 하나님이라는 명제도 다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밟히기 위해 존재하느니라”는 소설 속 그분의 말씀도 바로 이 깨달음에 잇닿아 있습니다.
신앙인 비율이 낮은 일본에서 이토록 깊은 신앙적 성찰의 문학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하는 질문은 우리 한국교회의 신앙과 문학에 대한 질책이 되고 맙니다.
주님의 수난 절기에 우크라이나 참상을 목도하며 이 책을 떠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