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설교] ‘얼마나 아프실까’에서 ‘어찌할꼬’로

입력 2022-04-14 03:06

지금은 사순절 마지막인 고난주간입니다. 내일은 예수님이 죽으신 금요일입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고 계십니까. 아마 어떤 분은 금식으로, 어떤 분은 미디어를 절제하면서(미디어 금식), 또 어떤 분은 즐거움의 수단들, 유흥을 멀리하며 주님의 고난을 묵상할 것입니다. 어떤 분은 말 수를 줄일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궁극적인 자세일까요. 금식하고 말 수를 줄이는 것으로 그분의 고난을 묵상했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이것은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는 진정한 방법이 아닙니다. 우리가 진정 묵상해야 하는 바는 십자가에서 내뱉은 주님의 말씀에 잘 녹아 있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이것은 자기를 못 박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였습니다. 그들이 어떤 자들입니까. 죄 없는 분을 정죄한 이들입니다.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소리 지르며 열렬히 환영한 지 5일 만에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더 크게 고함치는 자들입니다.

평화의 왕으로 오신 주님을 강도와 함께 못 박으며 부랑자 취급한 자들입니다. 선지자 노릇을 하라고 눈 가린 채 때리고, 임금처럼 굴라고 군용 홍포를 덮어주며 놀리던 자들이었습니다. 제자들은 어땠습니까. 칼을 휘두르면서까지 주님 곁에 있겠다고 소리치던 베드로는 바로 다음 날 예수님을 욕하고 저주했습니다. 주님은 자신의 고통 따위는 아랑곳하지 않고 저들의 용서를 구하십니다.

십자가에서 가장 먼저 입을 열어 하신 말씀이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입니다.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기에 우리 묵상의 진정한 내용이 담겨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십자가에 달려 고통받는 그 자리에서조차 기도하실 정도로 타락하고 비참한 우리 존재가 바로 묵상의 내용이어야 합니다. 주님이 우리의 동정 대상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의 염려거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의 찔림은 우리 비참함 때문이고 주님이 하나님과 단절되는 저주로까지 던져진 것은 모두 우리 죄악 때문입니다. 이런 일련의 사실을 앞에 두고 어찌 단순히 ‘얼마나 아프실까’ 할 수 있겠습니까. “오호라 나는 곤고한 자구나(롬 7:24)” “나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치 않는 자요 각색 정욕과 행락에 종노릇한 자요 가증스러운 자구나(딛 3:3)”라고 고백하며 ‘어찌할꼬’하며 울어야 하지 않을까요.

우리 구주는 전에도 우리들 때문에 우신 적이 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눅 19:41) 왜 우셨습니까. 예루살렘 앞에 놓인 서슬 퍼런 하나님의 심판을 미리 보시고 우셨습니다. 주후 70년 무자비하게 성전이 짓밟히고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고통당할 것을 알기 때문에 우셨습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무서운지 느끼셨기 때문에 운 것입니다. 그래서 직접 우리에게 명하셨습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눅 23:28).”

‘얼마나 아프실까’에서 돌이켜 ‘어찌할꼬’라는 탄식하는 우리가 되길 기도합니다. 주님의 고통이 아니라 우리의 죄와 비참함 때문에 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진짜 문제는 하나님의 독생자가 그토록 잔인한 고통을 당하셔야 할 만큼 심각한 우리의 죄와 비참에 있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아래 엎드려 우리 죄악과 비참함을 내려놓는 자는 참된 용서와 위로를 충만히 받을 것입니다. 이 은혜가 여러분에게 넘치길 소망합니다.

문지환 목사(부산 제8영도교회)

◇1984년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교회로 설립된 제8영도교회는 전쟁 후 정착민 많은 부산 영도 지역에 복음을 전하고 가난하고 연약한 자들의 벗이 되길 소망한다. 온 성도들이 행복하게 신앙생활하고 있다. 문지환 목사는 지난 2월 초 3대 담임목사로 청빙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