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후 3시의 헌책방] 잔인한 4월의 사랑시집 사건

입력 2022-04-16 04:04

헌책방의 중요한 일 가운데 하나는 책 매입이다. 헌책은 일꾼이 직접 발로 뛰면서 수집해야 한다. 고단하고 번거로운 일이긴 하지만 가끔 눈이 번쩍 뜨일 만큼 좋은 책을 구하게 되면 그 기분이 며칠은 갈 만큼 즐거울 때도 있다.

그러나 이렇게 구한 책이라고 해서 다 좋은 것은 아니다. 헌책방 일의 치명적인 단점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팔리지 않는 책을 반품할 수 없다는 거다. 아무리 좋은 책이라고 해도 팔리지 않으면 짐일 뿐이다. 그냥 좋아 보이는 짐이다.

헌책방 직원을 거쳐 지금은 한 가게의 주인으로 일하며 20년 가까이 헌책을 사고팔았다고 하면 이젠 책 매입에는 전문가가 됐을까? 절대 그렇지 않다. 오래 일했다고 해도 실수는 있기 마련이다. 불과 몇 해 전에도 이런 엉뚱한 일을 겪었다.

때는 4월, 세상 모든 게 봄처럼 아름다워 보이는 날이었다. 전화가 와서 받아보니 우리 책방에 책을 팔고 싶다는 용무였다. 수화기 저쪽에선 조금 느린 중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는 젊은 시절 시인이 되기를 꿈꾸며 습작을 해왔는데 이제는 그 꿈을 접었기에 사 모았던 시집을 처분하겠다고 말했다. 한 권 한 권이 명작들뿐이라 너무도 아쉽지만 그 시집들이 없어져야 마음 편히 시인의 꿈을 접을 수 있을 것 같다며 담담한 목소리로 사연을 설명했다.

나는 그 목소리의 진정성에 이끌려 시집을 택배로 보내 달라고 했다. 심지어 매입 대금도 미리 입금했다. 찜찜한 마음은 전혀 없었다. 전화로 젊은 시절의 꿈을 이야기하는 그 중년의 사나이는 내가 보기에 이미 시인이었다. 시인의 꿈이 담긴 책인데 너무 싼 값을 주고 산 게 아닐까 하는 미안한 생각까지 들었을 정도다.

그러나 택배로 받은 책을 보고 나는 기겁했다. 종이상자로 몇 개나 되는 수백 권 모두 하나도 빠짐없이 1990년대 유행했던 일명 ‘사랑시집’뿐이었다. 원태연 서정윤 같은 작가가 인기 있었던 그때의 시집 말이다. 제목도 보통 이런 식이다. ‘가슴 설레는 밤 너에게 립스틱을 사주고 싶다’ ‘손끝으로 원을 그려봐 네가 그릴 수 있는 한 크게 그걸 뺀 만큼 널 사랑해’. 지금 보면 어떨지 몰라도 당시엔 엄청난 베스트셀러였다. 그래, 당시엔 말이다. 그건 그렇고, 진지한 목소리의 그 사나이는 대체 어떤 시인이 되고 싶었기에 이런 시집을 수백 권이나 사 모았단 말인가? 허탈하기 그지없었다.

시집은 거의 팔리지 않아 종이상자에 담긴 그대로 보관해놓고 있었다. 다행인 것은 이 시집들이 20대 이하 손님에게는 조금 흥미를 끈다는 거다. 사랑시집이 인기를 끌던 때 그들은 아직 태어나지도 않았다. 세대는 달라졌어도 사랑의 감성이란 변하지 않는 걸까?

그렇다고 책을 비싸게 팔지는 못한다. 권당 가격은 1000원이다. 이마저도 1주일에 한두 권이나 팔릴까? 솔직한 말을 하자면, 나는 당시 이 책들을 사는데 1000원보다 많은 돈을 썼다. 4월은 잔인한 달이라고 했던 어떤 외국 시인의 말이 이처럼 현실적으로 다가오는 사건도 또 없을 것이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