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를 괴물이라 부르는 소년이 있다. 연상호 애니메이션 영화를 원작으로 한 티빙 오리지널 ‘돼지의 왕’ 철이. “돼지가 될 순 없어. 난 말야, 진짜 악당이 돼 가고 있어. 근데 생각해 보니까 악당이 되는 거로는 부족해. 괴물, 진짜 괴물 말이야.” 14살 소년 철이는 배움과 우정보다는 잔인한 폭력으로 가득한 학교에서 살아남기 위해 괴물이 되기를 선택한다. 소년은 어떤 세상을 맞이할까? 불행히도 철이가 어른이 되어 맞이할 세상을 우리는 모른다. 철이는 자신을 괴롭히는 모든 사람에게 돌이키지 못할 끔찍할 기억을 남기기 위해 ‘공개 자살’을 계획하고 학교 조회시간에 옥상에서 떨어지기 때문이다. 만약 철이가 살아남았다면 불우한 가정사와 폭력적 학교생활로 점철되는 모든 역경을 이겨내고 이 사회의 선량한 시민이 됐을까. 아니면 더욱 잔인한 괴물이 됐을까.
여기까지가 흔히 보던 학교폭력물의 클리셰 같았다면 ‘돼지의 왕’은 한 번 더 등을 떠민다. 사실 철이는 자살한 것이 아니었다. 누가 철이를 죽인 걸까. 어떻게든 학교에 적응하고 살아보려고 ‘공개 자살’ 계획을 포기한 철이를 옥상에서 밀어 떨어뜨린 건 친구 종석이었다. 철이는 죽어서 전설이 돼야 했고, 그래야 교실 내에서 늘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못하던 아이들을 대신한 ‘돼지의 왕’이라는 신화가 완성되기 때문이다.
“상위의 학생들은 자신들과 비슷한 학생끼리 모여 ‘상위 그룹’을 형성하고 그러한 모습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학생들이 모여 ‘중간층(중위 그룹)’이 결정되며 이곳에서 탈락한 학생 즉 거의 아래 학생들이 모여 ‘하위 그룹’의 무리가 정해진다. 이렇게 해서 신학기는 시작된다.” 일본 작가 스즈키 쇼의 책 ‘교실 카스트’는 인도의 신분제도인 카스트 제도를 교실 안에 적용한다. 쇼는 실제로 많은 중학생과 선생님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쓴 이 책에서 학교폭력과 청소년 자살 원인을 교실 안의 신분제도, 즉 교실 카스트에서 찾는다. 2013년 발간된 책이지만 논의는 여전히 유효하다. 동급생 사이에서도 높은 지위와 낮은 지위가 반드시 구분되고, 자신이 어디에 위치하느냐에 따라 학교생활은 달라지는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학생 모두가 자연스럽게 이 지위의 격차를 인정해 버린다는 것이다.
서열의 자리매김은 남학생과 여학생이 다른 양상으로 나타난다. 남학생들은 신체적 폭력이, 여학생들은 서너 명의 무리가 한 명을 따돌리는 관계적 폭력이 발견된다. 반면 서열에 미치는 영향은 남녀 학생 모두 비슷하다. 신체 발달 차이에 따른 제압이나 운동 실력, 외모, 학업 성적 등 학교생활에서 드러나는 가시적 영향도 있지만 가정 형편과 가정의 억압적 문화 등도 중요하게 작동한다. 한 번 매겨진 학생의 카스트 지위는 출생과 함께 정해지는 인도 카스트 제도의 굴레처럼 반이 바뀌거나 학년이 바뀌어도 크게 변하지 않고 따라다닌다. 유일한 탈출구는 아이들과 함께 하는 교사들일 텐데, 카스트 존재를 인식하고 있는 교사들조차도 상위층 학생들에겐 부드럽고 우호적으로 대하는 경향이 있다. 쇼는 교사들이 교실 카스트를 ‘능력’에 의한 것으로 보고, 학급의 원활한 운영을 위해 그것을 묵인하거나 활용한다고 비판한다.
두려운 건 교실 카스트 지위가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서도 그대로 이어질 수 있다는 가능성이다. 학교라는 세계에서 일어나는 이런 기형의 권력구조 집단 질서에서 상위 그룹 아이들은 권력을 주무르고 하위 그룹 아이들은 그들의 괴롭힘을 견디는 것으로 적응해 나간다. 학교는 원래 그런 곳이라는 잘못된 공동체 인식은, 성인이 되어 맞는 사회도 원래 강자와 약자로 나뉜다는 생각으로 이어질 뿐이다. 분명한 것은 학교 내에서 일어나는 이런 서열화는 개인의 실패가 아니라는 것이다. ‘돼지의 왕’의 세 친구 경민, 종석, 철이에게 누군가 이렇게 말해야 했다. “학교는 영원히 다니는 곳이 아니야. 네 인생에서 찰나의 순간일 뿐이지. 학교에 가고 싶지 않으면 안 가도 돼. 지금의 상황이 네 일생 동안 계속되지 않아, 절대로.”
최여정 문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