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등포 고시원 불… “숨진 그 양반, 다리 불편했는데”

입력 2022-04-12 00:02 수정 2022-04-12 00:02
11일 화재가 발생한 서울 영등포구의 한 고시원 창문들이 검게 그을려 있다. 권현구 기자

서울 영등포구 한 고시원에서 새벽에 화재가 발생해 2명이 숨졌다. 이 고시원 거주자의 80%는 60대 이상 고령의 장기 투숙객이었으며, 대부분이 일용직으로 일하거나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인 것으로 알려졌다.

영등포소방서는 11일 오전 6시33분쯤 발생한 고시원 화재로 26호 거주자 A씨(75)와 15호 거주자 B씨(64)가 사망했다고 밝혔다. 두 사람은 대피하는 과정에서 각각 복도와 휴게실에서 쓰러졌다. 다량의 연기를 흡입한 상태에서 화상을 입어 숨진 것으로 추정된다.

화재가 난 고시원은 소위 ‘달방’처럼 월 이용료를 꾸준하게 내면서 장기 투숙한 이들이 대부분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이용료는 월 25만~28만원 수준이다. 총 19명의 투숙객 가운데 40대 1명과 50대 3명을 제외한 나머지는 60~80대의 고령층이다. 사망자들 외에 17명은 스스로 몸을 피했다.

사망한 두 사람 모두 기초생활보장 수급자였다. 고시원 측에 따르면 A씨는 이 고시원에서 9년간 살았다. 고시원 관계자는 “여동생에게 매달 50만원씩 받아서 생활하다가 얼마 전부터는 여동생도 A씨와 연락을 끊은 것 같았다”며 “월세를 밀리거나 하진 않았다”고 전했다.

거동이 불편했던 A씨는 화재 발생 후 신속한 대피가 어려웠을 것이라고 주변인들은 전했다. 고시원에 거주하는 최모(65)씨는 “A씨는 평소에 다리가 아파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느릿느릿 걸어다녔다”고 했다. 다른 주민 이모(69)씨도 “불이 나기 직전인 오전 5시쯤 A씨를 봤는데 부엌에 넘어져 있어서 일으켜줬다”며 “그 정도로 잘 걷지 못하는 상태였으면 불이 났을 때도 넘어져서 못 빠져나왔을 수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B씨는 지난 3일부터 고시원에 거주하기 시작했다가 참변을 당한 것으로 알려졌다. 인근 고시원이 리모델링을 하면서 장기 투숙자 몇몇이 사고가 난 고시원으로 옮겼는데, B씨도 그런 경우였다고 한다. B씨 역시 별다른 직업 없이 매달 나오는 정부 지원금으로 월세를 충당한 것으로 전해졌다.

불은 발생 3시간 만인 오전 9시37분쯤 완전히 꺼졌다. 소방 당국은 화재 후 고시원 내 간이 스프링클러 등 소방 시설은 정상적으로 작동했다고 밝혔다. 다만 간이 스프링클러의 방수량이 많지 않아 자체적으로 불이 잡히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변 CCTV 확인 결과 고시원 외부에서 내부로 침입한 흔적은 없었으며, 현장에서 인화물질도 발견되지 않았다.

윤영재 영등포소방서 소방행정과장은 “방화인지 실화인지 조사하는 중”이라며 “경찰 등 유관 기관과 함께 합동 감식을 진행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성윤수 기자 tigri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