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가수리의 시대가 온다. 스마트폰이 고장나면 부품을 사서 직접 수리하는 것이다. 삼성전자, 애플, 구글 등은 미국에서 잇따라 자가수리 제도에 시동을 걸고 있다. 소비자 입장에서 싼 값에 수리를 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다만 한국에서는 삼성전자의 경우 촘촘한 사후관리(AS) 망을 구축하고 있어 실효성이 떨어진다는 관측도 나온다.
11일 업계에 따르면 삼성전자는 올해 여름부터 스마트폰을 스스로 수리할 수 있는 프로그램을 미국에서 운영한다. 대상 모델은 갤럭시 S21, S20과 갤럭시 탭S7+다. 사용자는 디스플레이, 충전 포트 등을 직접 교체할 수 있다. 교체한 부품을 삼성전자에 반환해 재활용할 수 있다. 삼성전자는 상반기 안에 ‘제조사 인증 재생 자재 프로그램’을 도입해 재활용 소재 사용을 확대할 계획이다. 온라인 수리 커뮤니티인 ‘아이픽스잇(iFixit)’과 협력해 자가수리 프로그램도 운영한다.
구글은 지난 9일 아이픽스잇과 손을 잡고 픽셀 스마트폰용 수리 도구를 제공한다고 발표했다. 올해 말에 배터리, 디스플레이, 카메라 모듈 등을 교체할 수 있는 수리용 키트를 내놓는다. 애플은 올해 상반기부터 아이폰12, 아이폰13 등의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시행한다고 지난해 11월에 일찌감치 밝혔다. 디스플레이, 배터리, 카메라를 시작으로 하반기에는 범위를 넓힐 예정이다. 시행 국가도 차츰 확대할 방침이다.
주요 스마트폰 업체가 자가수리 프로그램을 내놓는 건 ‘수리할 권리’(수리권, Right to Repair)의 강화 추세와 맞물려 있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은 지난해 7월 제조업체들의 수리 제한 관행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사용자의 수리할 권리를 확대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같은 해 10월 미국 특허청은 수리할 권리 확대를 사실상 법제화했다. 프랑스에선 의무적으로 수리 용이성을 점수(0~10점)로 매겨 표시하도록 한다. 삼성전자가 프랑스 업체 오피니언웨이에 의뢰해 진행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 82%는 수리 가능성 지수가 높은 제품이 있다면 좋아하는 브랜드를 포기할 의향이 있다고 답했다.
자가수리를 강화하면 소비자는 보다 저렴한 가격에 제품을 수리할 수 있게 된다. 미국 소비자 공익연구단체인 US PIRG는 제품을 교체하는 대신 수리하면 가구당 연간 약 330달러(40만원)를 절약할 수 있다고 추산했다. 제품 사용 주기가 길어지면서 자연스럽게 전자폐기물 발생도 줄일 수 있다.
그러나, 한국에서 자가수리가 확대할 수 있을지 미지수다. 삼성전자의 경우 사후관리 망을 워낙 촘촘하게 구축하고 있어 자가수리 제도를 도입할 필요성이 떨어진다. 일단 삼성전자는 자가수리 제도를 한국에 도입할지 검토 중이라는 입장이다.
한 업계 관계자는 “자가수리를 하려면 사용자가 어느 정도 기기를 다룰 줄 알아야 하는데, 비용과 접근성 측면에서 AS센터에 가는 게 나을 수 있다”면서 “애플 같은 외국 업체들은 AS 망이 부실해 자가수리 확대가 소비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준엽 기자 snoop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