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 전 평남에 교적을 둔 한 청년 교인이 총회 견학을 왔습니다. 그 청년이 총회를 구경하고 돌아가서 교회에 나오지 아니하기로 그 이유를 물은바 ‘총회에 가 보고 예수 믿을 마음이 없어졌다’고 했습니다. 평교인 중에는 노회나 총회를 성회로 알고 우러러보다가 정작 회의장에 와서 보고 성회답지 않다고 낙망하는 사람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니 우리의 일언일동(一言一動) 하나하나를 어찌 삼가지 아니하겠습니까. 그런데 금일의 교회는 어떠합니까. 양으로 보아서 그렇게 감소하지 아니하였더라도 질로 보아서는 한심한 일이 많습니다. 교회는 날로 속화(俗化)하여 가는 도중에 있습니다. 신앙은 박약하고 사랑은 아주 식어져 열심과 능력을 잃어버린 형편입니다. 제위는 금일의 교회를 어떻게 봅니까. 제가 볼 때는 낙관할 수 없는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근심할 바가 적지 아니합니다.”
위의 내용은 사도행전 20장 28절을 본문으로 한 길선주 목사의 ‘감독의 책임’이라는 설교다.(‘길선주’, 홍성사, 154쪽) 100년 전 노회나 총회의 모습이 오늘날의 모습과 어쩌면 이다지도 같을 수가 있을까.
평안남도의 한 청년이 순진한 마음으로 목사님 장로님들이 모여서 하는 회의는 얼마나 은혜롭겠는가 하고 기대하며 교단 총회에 참석해 방청했다. 그러나 결과는 그가 기대했던 거룩하고 화평한 회의가 아닌, 싸우고 고함치고 얼굴을 붉히는 모습을 보면서 크게 실망하고 돌아가서 다시는 교회에 나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는 바로 오늘날의 노회나 총회의 분위기가 아닌가.
길선주 목사님은 하늘나라로 가셨지만 그의 교훈은 여전히 살아서 우리를 책망하고 있다. 교회 지도자들이 교인들보고는 신앙의 변화와 성숙을 말하면서 정작 자신들은 100년 전 모습을 답습하고 있다면 이는 반성하고 회개해야 할 일이다. 이렇게 된 이유가 무엇일까. 경건의 능력은 물론 경건의 모양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금 이 순간의 예로 교회는 경건의 절기인 사순절을 어떻게 보내고 있는지 되돌아봐야 한다.
해마다 사순절이 되면 오래전 미국 뉴욕에 있을 때 TV에서 접한 이야기가 생각난다. 뉴욕에 사는 어떤 신부님이 밤에 맨해튼의 길을 걸어가고 있었다. 맨해튼 밤길은 아주 위험하기 짝이 없다. 아니나 다를까 강도를 만났다. 강도가 가진 것 모두 내놓으라고 총으로 위협했다. 신부님은 주머니를 뒤적거려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나는 지금 돈도 없고 시계도 차고 나오지 않았습니다. 내 주머니에는 지금 담배 한 갑밖에 없는데, 이거라도 필요하면 가져가십시오” 하면서 담뱃갑을 건네주려고 했다. 그랬더니 그 강도가 하는 말이 “신부님은 사순절에도 담배를 피우십니까. 나는 사순절에는 담배를 피우지 않습니다”라고 말하며 그냥 가버렸다는 이야기다.
오늘 한국교회는 사순절에 담배도 피우지 않고 술도 마시지 않는다. 새벽기도도 열심히 하고 성경도 많이 본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여러 가지 교회 경축 행사가 사순절에 그대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리고 한국교회를 망치는 주범인 각종 회의도 사순절에 제약 없이 행해지고 있다. 회의에서의 싸움과 분쟁이 여전하고, 차기 선거와 한 자리를 위한 물밑 작업과 경쟁이 치열하다. 이는 교회 지도자들이 주님의 고난은 뒤로한 채, 명예와 감투에 종교적 혼을 다 빼앗겨버린 초라하고 벌거벗은 모습이다.
사순절 기간에는 회의만을 위한 모임을 없애야 한다. 굳이 모인다면 주님의 고난에 동참하고자 하는 모임이어야 한다. 40일간 회의가 없다고 교회가 망하지 않는다. 40일간의 ‘경건의 모양새’도 없는 종교라면 그 장래가 암담할 뿐이다.
문성모 (강남제일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