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마당] 북악산

입력 2022-04-07 04:10

조선시대에는 북악산을 백악산이라고 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태조가 백악산을 지리산, 무등산, 계룡산 등과 함께 호국의 신으로 예우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1405년 태종은 백성들을 모아 백악산에서 송충이를 잡게 했고, 1466년 세조는 백악산에서 사냥을 했다. 1473년 성종은 창덕궁 후원에 있던 흰 사슴을 백악산에 놓아주었다. 조선왕조실록에 관련 기록이 300건 가까이 나올 정도로 사람들과 가까운 산이었다.

조선시대 이전에도 삼각산 아래 높이 342m의 화강암 산을 백악산이라고 불렀다. 고려 문종 때 ‘남경천도설’은 백악산이 천하의 명당이라고 주장한 예언서들을 근거로 삼았다. 청와대 안에는 아직 남경 궁궐터가 남아있다. 백악이라는 말 자체가 삼국유사에 기록된 단군 왕검의 도읍 아사달의 이두식 표기라고도 한다. 아사는 밝다 또는 희다를, 달은 산을 의미하므로 백악이 곧 아사달이라는 것이다. 물론 한반도에 백악이라는 이름을 가진 산이 한둘이 아니고, 단군 왕검이 서울에 자리를 잡았다는 기록은 없다. 백악이라고 할 만큼 산세가 좋고 지리적 이점을 두루 갖췄다는 뜻일 것이다.

백악산은 1961년 국토지리정보원 국가지명위원회 고시로 공식적으로 북악산이 됐다. 사실 조선시대에도 북악산이 쓰이긴 했다. 세종실록에는 1425년 세종이 천문을 살피는 서운관 관리에게 북악산에 올라 월식을 관찰하라고 했다는 기록이 나온다. 백운대, 인수봉, 만경대 가 뿔처럼 솟은 삼각산이 숙종의 산성 축성 이후 북한산으로 함께 불리다가 공식 지명이 된 것과 비슷하다. 문화재청은 2009년 국가지정문화재(명승 제67호)로 지정하면서 잊혀진 백악을 되살렸다. 북악산에 오르면 정상석에 백악산이라고 새겨진 이유다.

청와대에 막혔던 북악산 남측 등산로가 6일 개방됐다. 다음 달이면 청와대가 공개되는데 뒤늦게 등산로를 여느냐는 냉소가 있지만 막힌 길이 열리는데 굳이 시비를 따지고 싶지 않다. 사람들이 백악산이라고 부르든, 북악산이라고 하든 그 산은 그곳에 그대로 있으니까.

고승욱 논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