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무고한 자들의 고난

입력 2022-04-07 03:01

사순절을 지나는 지금, 이 땅에는 무고한 자들의 고난이 넘쳐난다. 어떤 이는 전쟁으로, 어떤 이는 자연재해로 하루하루가 끔찍하게 흘러간다. 역사 속에는 알 수 없는 고난으로 고통당하는 사람이 늘 있었다. 그러므로 나에게만은 그런 고난이 일어나지 않을 것이란 믿음은 교만하고 황당하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났지’에 답할 수 없는 고난이 나에게도 일어날 수 있고 고난 앞에서 인간은 참으로 무력하기만 하다. 무력하게 절망하며 무력하게 억울해하며 결코 답을 찾을 수 없는 ‘왜’만을 외친다. 고난을 견뎌야 한다면 그 답은 예수님뿐이다.

예수님은 죽음을 향해 당당하게 예루살렘으로 나아간다. 그곳에 고난이 있는 줄 알면서도 말이다. 고난을 피해 가라는 사람들에게는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고 말한다. 죽음이 오더라도 그냥 똑같이 해야 할 일을 하며 죽음을 피하지 않겠다는 말이다. 죽음을 앞둔 예루살렘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을 위로하며 자신을 죽이려는 자들과 논쟁한다. 언제나 당당하게 스스로를 변호하며 자신을 죽일 수 있는 자들에게 겁먹지 않는다. 그리고 겟세마네의 마지막 기도에서 예수님이 구한 것은 아버지의 뜻이다. 겟세마네에 이르기까지 예수님은 ‘왜’를 묻지 않고 꿋꿋하게 고난을 견딘다.

그러나 모든 고난이 끝나는 곳에서 예수님은 비로소 ‘왜’를 묻는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고 부르짖는다. 모든 고난을 받아들인 후에, 가장 마지막에 나오는 것이 ‘왜’인 것이다. 같은 질문이라도 그것이 언제 행해지느냐는 전혀 다른 결과를 낳는다. 우리는 고난에 직면해서 가장 먼저 ‘왜’를 묻고, 그 ‘왜’를 해결하느라 진을 뺀다. 찾을 수 없는 답을 구하고 있으니 고난의 짐은 더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모든 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겪어내며 가장 마지막 순간에 던지는 ‘왜’는 분명한 답을 가져온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이 부르짖었던 ‘왜’는 곧 부활이라는 답으로 연결될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죽음에서 일으켰다. 예수님이 ‘왜 버리셨나요’라고 물었다면, 부활은 ‘살리기 위해서’라는 하나님의 답변이다. 부활은 기쁨이지만, 부활에 이르는 길은 이렇듯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이다. 고난의 무게를 생각하면 잔인할 수 있지만, 답을 알 수 없는 고난으로 억울하기도 하지만, 고난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고난이 우리를 하나님의 생명으로 인도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목도하는 수많은 고난 속에서 기억해야 할 것도 이뿐이다. 하나님이 부활로 응답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사순절은 이런 고난의 의미를 훈련하는 것이리라. 고난의 원인을 찾으려는 우리 노력을 멈추고, 고난을 견디면서 하나님의 살리심에서 희망을 찾는 것이다. 출구 없는 ‘왜’는 고통이며 절망이기 때문이다.

남들 다 맞는 백신의 백만 분의 일의 부작용이 하필이면 왜 나인가, 라는 물음에 무슨 말을 할 수 있는가. 지도자의 정치적 술수 때문에 일어난 전쟁에, 하필이면 왜 내 집이 폭격을 맞고 피란민이 돼야 하는가, 라는 물음에 누가 답할 수 있는가. 어떻게 일어난지도 모르는 산불로 하루아침에 집과 삶을 잃는 일이 하필이면 왜 나에게 일어났는가, 라는 질문에는 무엇이라 말할 수 있는가. 위로조차 사치가 되는 절망의 순간에, 우리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살리는 하나님에 대한 믿음뿐이다. ‘왜’에 답할 수 없는 고난에 직면해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이 믿음이다. 그 믿음으로 서로를 일으키며 서로에게 힘이 되는 것을 배우는 것, 그것이 예수님의 무고한 죽음을 기억하는 사순절의 의미일 것이다.

김호경 서울장로회신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