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임총리제’ 시험대… ‘책임’ 맡길까, ‘책임’만 물을까

입력 2022-04-09 04: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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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덕수 전 국무총리가 윤석열정부 초대 총리 후보자로 지명되면서 그의 향후 역할과 행보에 이목이 쏠리고 있다. 특히 한 후보자가 과연 ‘책임총리’가 될 수 있을지가 관심거리다.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은 대선 후보 시절부터 총리에게 보다 큰 책임과 권한을 부여하는 책임총리제를 약속했다. 장제원 당선인 비서실장도 최근 기자들과 만난 자리에서 책임총리제에 대한 윤 당선인의 의지가 강하다는 점을 재차 강조했다.

그러나 지금까지 책임총리제가 제대로 시행된 적이 없었고, 현실적으로 구현되기가 어렵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대체적인 평가다. 권력이 대통령에게 집중된 대통령제하에서 책임총리가 등장하려면 대통령이 자신의 권한을 자발적으로 총리에게 양보해야 하기 때문이다.

책임총리는 헌법이 보장하는 국무위원 제청권과 각료 해임 건의 등을 실질적으로 행사할 수 있는 총리를 의미한다. 정치권에서 만들어낸 용어로 법적 개념은 아니다. 대통령에게 쏠린 막강한 권력을 분산시키고 견제하자는 취지이지만, 결국 책임총리의 구현이 전적으로 대통령의 의중에 달려 있으므로 여태까지 정권이 바뀔 때마다 거론이 됐음에도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

역대 정권의 초대 총리 가운데 책임총리에 가장 가까웠던 인물은 김종필(JP) 전 총리다. 김대중·김종필(DJP) 연합에 따라 JP는 김대중 대통령으로부터 경제·외교·통일 분야 내각 구성권 등을 건네받았다. 이 때문에 JP에게는 ‘실세 총리’라는 수식어가 붙었다. 입김이 센 청와대 수석들조차 JP의 결정에 이의를 제기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고 한다.

한 정부 관계자는 8일 “DJ가 탑승한 차량과 JP가 탄 차량이 성남 서울공항에서 광화문으로 이동할 때 총리 전용차가 대통령 전용차에 바짝 붙어서 가지 않자 JP가 노발대발 화를 내서 차량을 붙인 적이 있다”며 “다른 총리였다면 상상할 수 없는 일”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DJP 공동 정권의 지분을 가졌던 JP는 극히 예외적인 경우에 속한다. 역대 대통령들은 대개 초대 총리로 ‘화합형’ 또는 ‘실무형’ 인사를 선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황인성 전 농림수산부 장관을 첫 총리로 기용했다. 영남 출신 대통령이 지역 안배 차원에서 전북 무주가 고향인 황 전 장관을 총리로 발탁한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서울시장과 여러 부처 장관, 총리를 지낸 ‘행정의 달인’ 고건 전 총리를 초대 총리로 세웠다.

자원외교를 국정 슬로건으로 내걸었던 이명박 대통령은 한승수 전 외교부 장관을 첫 총리로 낙점했다. 김영삼 대통령과 마찬가지로 경남 거제 출신인 문재인 대통령은 화합과 탕평의 차원에서 호남 출신 ‘이낙연 카드’를 꺼내 들었다.

초대 총리가 대통령의 그늘에 가려져 정권의 방패막이로 이용되는 경우도 있었다. 박근혜정부 시절 정홍원 총리가 대표적이다. ‘관리형’ 인사로 평가됐던 정 총리는 세월호 참사 때 박 대통령을 대신해 여론의 뭇매를 맞고 물러났다.

전문가들은 책임총리제가 구현되기 위해서는 “헌법에 규정된 내각 통할권, 장관 추천권, 해임 건의권이 확실하게 보장돼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최진 대통령리더십연구원장은 “총리가 소신에 따라 장관 후보를 제청하거나 해임을 건의해도 대통령이 거부하면 그만인 것이 현실”이라며 “대통령이 총리의 주요 권한을 인정하고, 정책을 독자적으로 집행할 수 있게 해주면 책임총리제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했다.

조진만 덕성여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도 “윤 당선인이 총리의 법적 권한을 보장해주면 역대 정부에서 볼 수 없었던 책임총리가 등장할 수도 있을 것”이라며 “정치인 출신이 아닌 윤 당선인은 역대 대통령들과 달리 총리와 권한을 분산하는 데 있어 거부감이 크지 않을 수도 있다”고 관측했다. 책임총리제의 성사 여부는 결국 윤 당선인의 의지에 달렸다는 뜻이다.

장제원 실장은 지난 4일 “윤 당선인이 저보고 내각 인선안을 한 후보자에게 먼저 보고하라고 해서 그렇게 했다”고 밝혔다. 총리의 국무위원 제청권을 보장하기 위해 윤 당선인이 인선안을 사전에 한 후보자와 공유했다는 것이다. 한 후보자는 총리 지명 발표 전날(지난 2일) 윤 당선인을 만난 자리에서 책임총리제와 각 부처 장관에 대한 인사 추천권 보장을 언급하며 동의를 구했다고 한다.

한발 더 나아가 총리에게 차관급과 주요 공공기관에 대한 인사권까지 폭넓게 부여해 실질적 권한을 강화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온다. 정부의 한 관계자는 “인사권을 포함해 예산권까지 보장된다면 총리가 청와대의 견제에 흔들리는 일은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 후보자의 국회 인사청문회 통과 여부에도 관심이 쏠린다. 초대 총리 후보자가 청문회 문턱을 넘지 못한다면 새 정부의 국정 운영 동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박근혜 대통령은 대통령직인수위원장이던 김용준 전 헌법재판소장을 초대 총리로 지명했으나 두 아들의 병역 문제와 부동산 투기 의혹 등으로 지명 5일 만에 자진 사퇴했다. 총리 지명자가 자진 사퇴한 첫 사례였다. 당시 총리 인선이 원점으로 돌아가면서 정권 출범 준비에도 차질이 생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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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 당선인이 한 후보자를 낙점한 것에는 이런 사태를 겪지 않으려는 목적도 있어 보인다. 더불어민주당의 동의 없이는 총리 인준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한 후보자는 비교적 안전한 카드로 평가받는다. 과거 민주당 정권에서 중용됐던 호남 출신 인사인 데다 이미 청문회를 두 차례나 통과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민주당은 “‘호남 출신이다. 민주당 정부에서 일을 한 분이다’라는 것이 고려 요소가 돼선 안 된다”며 송곳 검증을 벼르고 있다. 한 후보자가 공직 퇴임 후 김앤장 법률사무소에 고문으로 있으면서 거액의 보수를 받은 점과 과거 론스타 사건 연루 의혹 등이 청문회에서 주요 쟁점이 될 것으로 보인다.

손재호 기자 say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