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 가까이 ‘하나의 교회’를 지향해 온 정교회가 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내부 균열 조짐을 보이고 있다. 전쟁을 일으킨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러시아 정교회의 수장 키릴 총대주교가 공동 행보를 취하면서 평화를 지향하는 정교회의 가치에 반하고 있는 게 표면적인 이유다. 하지만 2018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둘러싼 러시아 정교회와 정교회 세계총대주교청 사이의 묵은 갈등이 이번 전쟁으로 더욱 심화할 수 있다는 지적도 크다.
러시아 정교회발 파열음은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지난달 초 키릴 총대주교는 세계교회협의회(WCC)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이 서방 때문이라는 주장을 담은 편지를 보냈다. WCC를 향해서도 정치적 중립을 지키라고 요구했다. 이안 사우카 WCC 총무대행이 2월 24일 전쟁 발발 직후 키릴 총대주교에게 “푸틴 대통령에게 평화를 제안하고 평화의 중재자로 나서 달라”는 편지에 대한 답장에서다.
키릴 총대주교는 “공동의 신앙과 공동의 성인을 공유하며, 공동 기도로 연합하는 공동의 역사를 가진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갈등은 서방 때문”이라면서 “서방은 형제국인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인을 적으로 만들려 노력했고 무기와 전투 교관을 우크라이나에 넘치게 하려고 자금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키릴 총대주교가 푸틴과 거의 모든 분야에서 폭넓은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대목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친정부 행보에 대한 정교회 세계의 비판도 줄을 잇고 있다. 미국 뉴욕의 포드햄대학 정교회 기독교연구센터와 그리스 볼로스 신학 연구 아카데미의 정교회 신학자와 사제 수백 명은 “러시아 정교회가 적대감을 적극적으로 부추기는 방향으로 기도를 올리라고 신도들에게 지시하고 있다”며 “러시아가 모두에게 큰 위협이 되고 있고 그 중심에 러시아 정교회가 있다”고 비판했다.
러시아 내부에서도 문제 제기가 나오고 있다. 평화를 지지하는 러시아 정교회 사제 300여명은 “우크라이나에서 자행되는 푸틴의 잔인한 명령을 규탄한다”며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서쪽(나토)이나 동쪽(러시아) 어느 곳에서도 압력을 받지 않고 자신의 의사에 따른 선택을 해야 한다”고 밝혔다.
하지만 정교회 세계의 갈등은 이번 전쟁보다 수년 앞서 시작됐다. 2018년 우크라이나 정교회가 러시아에서 독립한 게 발단이었다. 당시 러시아 정교회에서 벗어나 독자적 교회로 자립하려던 우크라이나 정교회 공동체를 바르톨로메우스 정교회 세계총대주교가 승인했다. 전 세계 정교회의 수장인 바르톨로메우스 세계총대주교의 결정은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가 즉각 반발하기 시작했다.
키릴 총대주교는 “바르톨로메우스 세계총대주교가 교회 분열을 만들었고 이로 인해 러시아 정교회가 큰 피해를 봤다”며 책임을 세계총대주교청으로 돌렸다. 자치권을 침해했다는 이유에서였다. 단순 반발에 그친 게 아니라 러시아 정교회는 세계총대주교청과의 관계 단절을 선언하고 독자 행보에 나섰다.
공교롭게 같은 해 페트로 포로셴코 전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1997년부터 이어지던 러시아와의 우호·협력 조약 파기 법안에 최종 서명했다. 이로써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 갈등의 골은 더욱 깊어졌다.
러시아 정교회는 발빠르게 대응했다. 러시아 정교회는 해외 업무를 담당하는 일라리온 대주교를 세계 각지로 파견해 ‘러시아 정교회’의 간판을 단 새로운 성당을 세웠다. 당시 한국을 방문한 일라리온 대주교는 서울 중구 러시아대사관으로 러시아인 정교회 신자들을 초청해 “한국에 러시아 정교회의 성당을 세우겠다”는 소식을 알렸다. 그 자리에 온 러시아인들은 “이미 한국 정교회 성당에 출석하고 있고 다른 예배 처소는 필요치 않으며 성서 생활을 하는 데 조금의 불편함도 없다”고 분명한 반대 입장을 밝혔다. 하지만 러시아 정교회는 결국 서울 용산에 ‘러시아 정교회 대한교구 서울 사목구’라는 이름의 새로운 성당을 세웠다. 러시아 정교회가 정교회 분열의 씨앗을 이 같은 방법으로 전 세계에 심은 셈이다.
이미 우리나라에는 100여년 전부터 정교회 선교가 시작됐으며, 현재 한국 정교회 대교구(교구장 조성암 대주교)로 이어지고 있다. 비잔틴 양식으로 지어진 서울 마포구의 성 니콜라스 대성당을 비롯해 인천 부산 등 전국 7개 도시에 정교회 성당이 있다. 하나의 교회 전통을 잇고 있는 정교회의 오랜 유산에는 깊은 상처가 남았다.
정교회의 뿌리는 성경의 고대 교회 역사와 맞닿아 있다. 313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밀라노 칙령으로 공인했던 기독교도 지금의 정교회로 볼 수 있다. 2000년 가까운 역사 중 정교회는 단 한 차례 분열했을 뿐이다. 1054년 로마 교구가 정교회에서 벗어나 로마 가톨릭교회의 역사를 쓰기 시작했다. 당시 정교회에는 로마를 비롯해 콘스탄티노플과 안디옥, 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등 다섯 개 대교구가 있었다. 이 중 가장 규모가 컸던 로마 교구가 분리되면서 라틴어를 사용하던 로마 가톨릭교회와 나머지 그리스어권 교회로 나뉘었다. 이후 ‘동방 정교회’나 ‘그리스 정교회’로 불린 건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교회 공동체라는 의미가 담겨서다. 정교회 신자들은 동방이나 그리스 같은 수식어를 뺀 정교회라고 스스로를 칭하는 데 익숙하다. 정교회 앞에 루마니아나 아르메니아 같은 나라명이 붙는 건 각 지역의 자치권을 인정하기 때문이지 분열된 다른 교회여서가 아니다.
러시아 정교회의 독자 행보는 정교회 세계 안에서 가볍게 볼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하나의 교회 전통을 깬 두 번째 사례로 기록될 수도 있다는 우려 때문이기도 하다. 러시아 정교회가 정교회 세계총대주교청과 교류를 단절한 게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1990년대 중반 에스토니아 정교회가 러시아 정교회에서 분리할 때도 러시아 정교회는 교류 단절 카드를 꺼냈다. 에스토니아 정교회의 독립을 승인한 정교회 세계총대주교청의 결정에 대한 반발이었다. 갈등은 러시아 정교회가 6개월 만에 결정을 철회하면서 해소됐다.
‘6개월 단절’과 비교하면 이번 교류 단절은 5년이나 지속되고 있다. 그사이 교류 단절의 직접적 원인이 됐던 우크라이나와 전쟁까지 하면서 관계를 회복하기까지는 오랜 기간이 걸릴 수 있다는 조심스러운 관측도 나오고 있다.
전쟁이 계속될수록 과격해지는 키릴 총대주교의 발언 수위도 우려 섞인 전망에 힘을 더한다. 외신에 따르면 지난 3일 키릴 총대주교는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 러시아는 예부터 전쟁으로 고통을 겪어왔다”며 “우리는 절대로 전쟁을 위해 노력하지 않으며 남을 해치는 어떤 행위도 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러면서 “우리는 조국을 지킬 것이고 러시아인만이 러시아를 지킬 수 있다”며 우크라이나를 서방으로부터 지킨다는 ‘특수 군사작전’을 옹호하는 듯한 발언을 했다. 정교회는 더 이상의 분열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다. 박인곤 한국 정교회 보제는 “이미 1054년 로마 가톨릭과의 대분열의 아픈 경험을 가진 정교회는 러시아 정교회의 최근 행보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살피고 있다”며 “다만 지금의 현실은 분열이라는 결론이 아니고 더욱 단단하게 하나가 되기 위한 진통의 과정이다. 반드시 갈등을 해소하고 다시 하나의 역사를 써 내려 갈 걸 믿는다”고 말했다.
장창일 기자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