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온의 소리] 다름과 틀림

입력 2022-04-05 03:04

수백 개의 교단이 존재하는 한국 개신교. 문화체육관광부가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의뢰해 조사한 ‘2018년 한국의 종교 현황’에 따르면 개신교 교단은 무려 374개라고 한다. 수백 명의 총회장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개신교 연합기관인 한국교회연합(한교연)은 47개, 한국교회총연합(한교총)은 33개,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는 9개, 한국기독교총연합회(한기총)는 78개 회원 교단으로 구성돼 있다. 중복으로 가입된 교단을 고려하더라도 여전히 적지 않은 숫자다.

규모도 천차만별이고 교리적 정체성이나 건전성도 확인하기 어렵다. 존재 여부나 활동조차 파악되지 않는 교단이 수백 개에 이른다. 위의 자료에 따르면 협조 요청에 응하지 않거나 교세가 거의 없는 경우가 374개 교단 중 248개였다고 한다.

정부가 개신교 대화 채널을 선정하기도 쉽지 않다. 불교 원불교 천주교와 비교하면 한국 개신교의 대표성을 담보하는 단체나 개인의 부재로 인해 주요 모임에는 늘 다수의 개신교 지도자가 참여한다. 2020년 8월 코로나19 관련 대통령과의 간담회에는 16명의 개신교 대표가 참석했다. 정부도 당혹스럽고 개신교도 난감하며 효율성은 떨어진다. 새 정부는 과연 개신교의 대표성을 가진 단체나 개인을 어떻게 판단하고 접근할지 궁금하다.

교파 분열에 정치 분열까지 겹쳤다. 수백 개 교단으로 분열된 것도 안타까운데 근간에는 촛불과 태극기로 시작해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각 교단 내부가 정치적 견해차로 분열됐다. 교파 난립과 정치 분열, 오늘 한국 개신교의 현실이다.

교회사적으로 교파주의는 일면 은혜의 선물인 것도 사실이다. 종교개혁 이후 각자의 신앙 성격에 따라 교파와 교단, 교회를 선택할 수 있는 여건이 만들어진 것은 긍정적이다. 하지만 무분별한 교권 쟁탈이나 갈등의 결과로 만들어진 인위적 교파주의는 한국 개신교의 아픔이다. 무엇보다 이단에 대한 연합 대처를 어렵게 만들었다.

부정적 교파주의 극복을 위해서라도 대표성과 공신력을 가진 개신교 연합기관의 설립은 중요하다. 분열을 지속하는 한 한국 개신교는 ‘개혁의 주체’가 아니라 ‘개혁의 대상’으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이다.

최근 연합기관들의 통합 시도가 힘겹게 진행되고 있다. 다행히 지난달 30일 한기총 임원회에서 우여곡절 끝에 ‘한국교회 연합기관 통합을 위한 기본합의서’가 통과됐다. 하지만 통합 시도 초기부터 기대와 함께 우려의 목소리가 나왔다. ‘연합’이 돼야지 ‘야합’이 돼서는 안 된다는 염려였다. 통합은 필요하지만 교권과 기득권을 목적으로 하는 사리사욕과 이단 문제에 대해 안이하고 무원칙적 접근은 경계해야 한다.

이단 문제는 통합의 최대 난제이지만, 그렇다고 통합을 명분으로 두루뭉술하게 덮을 수도 없는 중차대한 사안이다. 연합기관이 이단들의 신분세탁소가 돼서는 안 된다. ‘다름’이 아니라 ‘틀림’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교단 간 차이, 즉 ‘다름’은 수용할 수 있지만 이단의 ‘틀림’을 용납할 수는 없다.

그리스도를 위한 ‘연합’과 사리사욕을 위한 ‘야합’은 전혀 다르다. 성경과 신앙고백에 비추어 ‘다름’과 ‘틀림’은 반드시 구분돼야 한다. 교단은 성격이 다르더라도 성령 안에서 하나의 신앙고백을 공유한다. 하지만 이단은 성령을 거스르며 교회를 분열시킨다. 비성경적 이단은 ‘틀림’이고 신앙고백을 공유하는 교단은 ‘다름’이다.

다름과 틀림의 명료한 구분이 필요하다. 다름을 틀림이라고 주장할 때 독선이 합리화되고, 반대로 틀림을 다름으로 받아들일 때 야합이 정당화되고 미화된다. 그리고 그 여파는 고스란히 목회 현장과 성도들의 혼란으로 이어진다. 신앙고백은 타협의 조건이 될 수 없고 이단 문제는 협잡의 대상이 될 수 없다.

탁지일(부산장신대 교수·현대종교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