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개가 한 마리 있다. 서글서글한 얼굴과 옹골찬 턱, 길게 뻗은 탄탄한 네 다리와 충직한 성정에 이르기까지 나무랄 데가 없다. 평소라면 침착하고 유순한 녀석이지만 이빨을 빨갛게 드러내며 사람에게 달려들어 물어뜯을 때가 있다. 상대는 하필이면 꼭 피부색이 검은 사람들이다.
로맹 가리가 쓴 자전적 소설 ‘흰 개’의 주인공은 우연히 이 개를 만나 기르기 시작한다. 개의 정체는 백인 경찰들이 잘 훈련한 경찰견이다. 흑인을 보면 물어뜯게 훈련된, ‘인종차별하는’ 개 말이다. 개를 그렇게 만든 건 결국 자신을 포함한 백인 기득권 사회이기에 주인공은 당혹하며 수치스러워한다.
소수자에게 기득권이 느끼는 죄의식은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 중 하나다. 주인공의 아내는 자신이 백인 특권층이라는 죄의식 탓에 흑인 룸펜들에게 집을 내주다시피 한다. 그는 아내를 흑인들이 이용하고 있다며, 불순한 목적이 뻔히 보이는 그들을 증오하면서도 자신의 감정이 옳은지를 스스로 묻는다. 2022년의 한국 사회는 난데없는 ‘소수자 정치’ 논란을 겪었다. 다음 달 정권을 잡을 제1야당의 대표가 장애인단체의 시위를 비난하면서였다. 그는 여당 출신 전임 시장이 약속한 걸 왜 야당 소속인 현 시장에게 따지느냐고 물었다. 출퇴근길의 시민들, 그러니까 비장애인들을 투쟁 대상이자 볼모로 삼고 있다며 욕했다.
관심이 간 건 그가 ‘사회적 약자를 대중으로부터 갈라치기한다’는 비판을 받자 내놓은 답이었다. 그는 “소수자 정치의 가장 큰 위험성은 성역을 만들고 그에 대해 단 하나의 이의도 제기하지 못하게 틀어막는다는 것”이라고 했다. 장애인들이 소수자라는 이유로 자신의 정당한 비판이 외면받는다는 이야기다.
로맹 가리가 소설 속에서 던지는 질문도 얼핏 보기엔 비슷하다. 그는 결코 순수하지 않은 약자, 그들을 향한 죄의식 탓에 당연한 의문조차 제기하지 않는 사회를 그려냈다. 그 풍경이 소수자들의 정파성과 야만성을 주장한 한국의 젊디젊은 야당 대표를 연상케 했다.
소설이 쓰인 건 1970년, 즉 68혁명의 시대다. 50년 넘은 질문이 먼 한국 땅에서 익숙하게 반복된 건 같은 현상이 여전해서다. 당시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거세게 인 사회운동의 중심에는 소수자 정치가 있었다. 이는 성별과 인종, 문화 등 각 부문에서 억압받는 소수와 억압하는 다수의 구조로 세상을 설명했다.
당시의 사회운동은 여러 면에서 세상을 진일보시켰지만 한계가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를 공감하고 이해하기보다 피해자로서의 자신의 당사자성을 강조했다. 인종과 성별을 비롯해 정체성으로 구분되는 각 공동체가 이익집단처럼 피해자인 자신의 모습만을 내세웠다. 로맹 가리의 소설 속 질문은 이 지점을 정확히 짚는다.
다만 소설에서 로맹 가리는 질문이 정당한지 끊임없이 성찰하며 갈등한다. 개를 보며 느끼는 수치심도 그 고민을 상징한다. 애초 작가는 프랑스인으로 미국에 살며 평생 경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자문한 인물이다. 그의 질문은 어떤 게 옳은지 묻는 자기성찰적 고민이지, 이번처럼 소수자를 공격하려 쓰는 전가의 보도가 아니다.
맹렬한 분노는 세상을 정당한 방향으로 이끌기도 하지만 때론 소모적인 적대로 물들인다. 말할 수 없이 복잡다단한 지금의 세상에서 분노의 방향을 올바르게 정하는 건 특히나 쉽지 않다. 그런 성찰이 없는 단편적인 분노와 구분짓기는 우리 자신을 소설 속 ‘흰 개’로 만든다. 말의 책임이 남들보다 큰 이들의 경우에야 두말할 나위가 없다.
시위하는 장애인들을 찾아 손을 내민 같은 당 의원의 행동은 그래서 귀하다. 그는 상대와 자신 사이 선을 긋고 상대를 이해 못 할 존재로 규정한 게 아니라, 왜 그러는지를 듣고 공감하려 애썼다. 스스로가 장애인임에도 그들과 같은 편임을 강조하기보다 동등한 존재로서 몸을 낮췄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가능성은 그런 모습에 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적대보다 공감과 연대다.
조효석 사회부 기자 prome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