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는 개표방송을 앞두고 부랴부랴 중고 텔레비전을 사왔다. 휴대폰이나 노트북으로도 방송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셨던 것이다. 다만 후에 그 사실을 알고도 엄마는 꼭 텔레비전으로 개표방송을 보고 싶어했다. 구매한 텔레비전은 25인치로 요즘 나오는 거대 텔레비전에 비하면 아주 작았다. 그러나 크기 역시 중요치 않았다. 엄마께 텔레비전이란 공식적이고 상징적인 무언가처럼 보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텔레비전은 국민을 하나로 묶는 도구였다. 시청률이라는 표본은 국민의 입맛을 반영하는 것 같았다. 방송사의 일방향적 송신은 우리를 무거운 텔레비전 앞에 앉게 만드는 강제성을 부여했다. 대선이나 월드컵, 올림픽 같은 나라의 대소사를 두고 우리 가정이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다면 그것은 다른 가정 또한 거실의 텔레비전 앞에 앉아 있음을 뜻했다. 그러한 감각은 남들과 같은 국민으로 존재한다는 소속감을 가져다줬다.
그런데 아뿔싸 아무도 텔레비전 설치 방법을 몰랐다. 엄마는 결국 본인의 휴대폰으로 방송을 봤다. 며칠 뒤 설치 기사를 통해 연결에 성공했다. 관리비에 포함돼 있는 텔레비전 수신료 덕에 수십 개의 채널이 쏟아졌다. 텔레비전을 안 본 지 오래고 게다가 우리 가정은 한 번도 ‘케이블 방송’을 설치한 적이 없어 그 진풍경이 조금 낯설었다. 나는 어렸을 때 오직 다섯 가지 채널만을 이동하며 눈이 새빨개질 때까지 텔레비전을 보곤 했다.
신문에서 편성표를 뒤지던 일이 전생 같다. 그렇다고 전생으로 돌아가고 싶은 건 아니다. 이제는 집에서 리모컨을 독점하던 ‘리모콘의 제왕’이 사라졌다. 각자의 방에서 각자의 기기로 보면 그만이니. 다만 선택의 폭이 너무 넓어지고 강제성이 없어지니 아아 정신이 산만해져 온다. 엄마는 새로 설치한 텔레비전을 켜면 리모컨으로 11번부터 누르고 그 이하로만 채널을 움직인다. 관성 탓이라고 하지만 내게는 그 선택과 집중이 놀랍다.
이다울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