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을 요구하는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의 지하철 시위가 정치적 쟁점으로 번지자 정부가 뒤늦게 제도 개선에 나섰다.
교통약자의 이동권 보장 문제는 오래전부터 개선 필요성이 제기됐지만, 번번이 제도권 문턱을 넘지 못했다. 지난해 말 교통약자법(교통약자의 이동 편의 증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하면서 일부 진전을 이루기는 했지만, 여전히 세부적으로 보완해야 할 부분이 적지 않다. 정치권과 정부가 더욱 적극적으로 교통약자의 이동권 개선에 팔을 걷어야 한다는 지적이다.
국토교통부는 지난 28일 조달청 국가종합전자조달 시스템 나라장터에 ‘교통약자 제도개선 연구’라는 주제의 연구용역을 긴급공고로 올렸다. 제안 요청서에 따르면 연구 용역에는 저상버스 도입 의무화 제도에 대한 구체적인 시행 방안과 지방자치단체의 특별교통수단 운영을 활성화하기 위한 방안, 이동편의시설의 설치 기준과 ‘배리어프리(BF)’ 인증기준 등에 관한 사항들이 들어갈 예정이다.
국토부 관계자는 31일 “용역 의뢰는 지난해 교통약자법 개정에 따른 하위법령을 만들기 위한 것이고 한 달 전부터 준비해온 사안”이라며 “최근 정치적 이슈 때문에 의뢰한 것은 아니다”라고 설명했다. 하지만 이미 법 개정안이 나온 지 석 달이 지났고, 교통약자법 개정안이 내년 초에 시행되는 상황에서 빨라야 올 연말에야 최종 결론이 나오는 연구용역을 발주한 것을 두고는 늑장 대응이란 지적도 제기된다.
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 문제는 대선 기간인 지난 2월 심상정 정의당 대선 후보가 TV 토론회 마무리 발언에서 제기하면서 정치권 이슈로 부상했다. 여기에 최근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전장연의 출·퇴근 시간 지하철역 시위를 두고 “장애인의 이동권 투쟁이 수백만 서울시민의 아침을 볼모로 잡는 부조리에 대해 (공권력이) 적극적으로 개입해야 한다”고 하면서 불을 댕겼다.
전장연은 서울 모든 지하철역 승강장에 엘리베이터 설치 등의 요구를 하며 지난해부터 서울 지하철 3·4·5호선 등에서 출·퇴근 시간대에 시위를 이어왔다. 이동 수요가 많은 출·퇴근 시간대에 불특정 다수의 시민이 불편을 겪는 전장연의 시위 방식을 두고는 일부 장애인 단체 내에서도 적절치 않다는 지적도 있다. 하지만 교통 약자의 이동권 보장 요구가 오래전부터 이뤄졌음에도 무관심 속에 더디게 진전된 것도 사실이다.
2001년 오이도역, 2002년 발산역에서 장애인이 휠체어 리프트를 이용하다가 추락해 사망한 사고가 발생한 이후 장애인 등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장애인단체 등을 중심으로 제기됐다. 과거보다 많이 개선되기는 했지만, 여전히 지난해 말 기준으로 22개 역에서는 장애인이 승강장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설치돼있지 않다.
교통약자의 이동권을 보장하기 위한 취지의 교통약자법은 2004년 처음 제정됐다. 이에 따라 국토부가 2007년부터 5년 단위로 ‘교통약자 이동 편의 증진 계획’을 세워 교통약자의 이동 편의를 지원하는 저상버스와 같은 특별교통수단 보급 확대를 추진해왔지만, 단 한 번도 목표치를 달성한 적이 없다. 특별교통수단이란 교통약자의 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휠체어 탑승설비 등을 장착한 차량을 의미한다. 하지만 그나마도 시내버스와 마을버스 등 노선버스에만 국한돼 있다 보니 교통약자의 시·군 단위를 넘어서는 장거리 이동은 거의 불가능에 아깝다는 지적도 많았다.
게다가 지역별로 특별교통수단 보급도 천차만별이다. 2019년 말 기준 서울의 저상버스 보급률은 53.9%였지만, 충남은 9.3%, 울산은 12.2%에 그쳤다. 전체 국내 노선버스 중 저상버스 보급률도 지난해 27.8%로 보급 목표치인 42%에 한참 못 미쳤다.
지난해 말 교통안전법 개정으로 노선버스 운영 업체들의 저상버스 도입이 의무화되고 교통약자가 다른 지자체로 이동할 때 이용할 수 있는 ‘광역이동지원센터’ 설치의 법적 근거는 마련됐다. 하지만 여기에도 ‘디테일의 함정’이 있다. 우선 고속버스, 시외버스는 여전히 저상버스 의무 도입 대상에서 제외돼 있다. 2015년 국가인권위원회가 휠체어 사용 교통약자가 고속버스, 시외버스를 편리하고 안전하게 이용할 수 있는 정책을 마련하라고 권고했지만, 버스 업체들은 비용 문제와 터미널 공간 부족 문제 등을 이유로 인권위 권고를 수용하지 않았다.
개정안 내용 중 광역이동지원센터 설치 등은 내년 7월에야 시행된다는 점도 아쉬운 부분이다. 설악산 케이블카나 모노레일 같은 삭도·궤도 차량에도 교통약자 지원 시설 설치가 의무화되는 건 2024년 1월 이후부터다.
광역이동지원센터 설치 비용을 중앙 정부가 지원하는 것에 관한 법 규정도 ‘지원해야 한다’ 같은 의무 규정이 아닌 ‘지원할 수 있다(임의 규정)’로 들어가 있다. 장애인 단체들이 정부가 예산 부족 등을 내세우며 실질적인 지원에 미온적일 수 있다고 우려하는 이유다.
선진국들은 우리보다 장애인 이동권 보장에 더 적극적이다. 영국은 2020년부터 모든 좌석버스에 휠체어 탑승설비와 고정설비, 탑승 보조 등의 교통약자 지원 기준을 충족하도록 하는 정책을 시행하고 있다. 일본도 이미 2000년에 장애인과 고령자 등의 대중교통 이용과 관련, ‘교통 배리어프리법’을 제정해 노선버스의 바닥 면 높이를 65cm 이하로 제한하는 법을 시행해왔다.
세종=이종선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