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점을 쳐본 적이 없어 몰랐다. 참 많은 사람이 점을 치고 있었다. 얼마 전 코로나로 한동안 못 봤던 지인들을 만났다. 승진한 분도 있었고 새로 유튜브를 시작했다는 분도 있었다. 승진했다는 분은 무속인한테 올핸 꼭 승진한다는 얘기를 들었다고 한다. 몇 번 고배를 마시고 반신반의했는데 진짜 승진을 했다면서 용하다더니 진짜 용하더라고 했다. 적지 않은 나이지만 아직 미혼인 그분은 올봄에 좋은 사람을 만날 거라는 말도 들었다며 은근히 기대하는 눈치였다. 다음 약속 날짜를 잡으면서 결과를 한 번 확인하자는 말이 오갔다. 다른 지인은 그 용한 사람의 소개를 부탁했다.
많은 사람이 무속에 기대는 이유는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일 것이다. 무속인 출신 한 기독교인은 ‘왜 21세기에도 무속인가’라는 국민일보 질문에 “현대화될수록 살아가는 게 힘들어서”라고 말했다. 그는 “사람들은 생존 경쟁에 내몰리고 돈벌이 걱정에 자녀 교육까지 고민하면서 처절하게 살아간다”면서 “미래가 불확실하니 자기가 알지 못하는 신비스러운 존재나 힘에 의존하고 싶어 한다”고 했다.
올 초 나온 한국리서치 여론조사를 보면 2017년 이후 한 번이라도 사주, 타로, 관상, 신점 등을 본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은 41%나 됐다. 점을 봤다는 사람들은 ‘수시로·정기적으로’(3%) ‘큰일 앞두고’(5%) ‘어쩌다 한 번’(33%) 해봤다고 한다. 놀라운 건 개신교인 23%도 최근 5년 사이에 점을 봤다는 것이다. 얼추 4명 중 1명꼴이다.
기독교인에게 무속은 금기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 해도 미래를 알고 싶은 사람들이 많은가 보다. 미래를 안다고 삶에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말이다. 미래가 힘겹고 고난이 예비돼 있다는 것을 안다면 오히려 불안 속에서 삶을 한탄하며 보낼 수 있다. 고난이 가져다주는 지혜를 놓칠 수도 있다. 반대로 미래가 장밋빛임을 안다면 나태와 무사안일이 우리 삶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임에도 미래에 집착한다는 것은 통제할 수 없는 미래를 우리가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나’라는 우상을 섬기는 것과 마찬가지다. 제럴드 시처는 ‘하나님의 뜻’에서 “성경은 우리에게 미래를 지레짐작해 염려하지 말라고 경고하고, 하나님의 주권을 확인해주며, 이미 알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라고 명령한다”면서 “(미래는) 우리는 모른다. 알 수 없다. 알아서도 안 된다”고 말한다.
지난 대선 기간 내내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을 둘러싸고 무속 논란이 계속됐다. 국민의힘 경선 후보 TV 토론에서 왼쪽 손바닥에 ‘왕(王)’자를 적고 나온 것이 시작이었다. ‘건진 법사’라는 인물이 선대위 네트워크본부에서 활동하며 후보 일정 등에 개입했다는 의혹도 불거졌다. ‘천공스승’이라는 사람이 멘토라는 주장도 있었다. 배우자 김건희씨의 녹취록에는 무정이라는 가짜 승려의 이름까지 등장했다. 대선 때마다 무속인과 관련한 소문들이 늘 있었지만 이렇게 큰 논란을 일으킨 적은 없었던 거 같다.
윤 당선인과 배우자는 기독교인은 아니다. 그렇더라도 정치에 무속이 개입한다는 것은 종교적 이유를 떠나 결코 용납돼서는 안 된다. 신국원 총신대 명예교수는 한 칼럼에서 “정치의 본질은 공동체의 정의롭고 평화로운 삶을 이루는 것인데 무속에는 공공성에 대한 의식이 없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신 교수는 “윤리성이 희박한 무속신앙에 진영 논리까지 더하면 그 위험성은 말할 필요가 없다”고 강조했다.
무속 논란의 ‘원죄’ 탓일까. 윤 당선인이 대통령 집무실을 청와대에서 용산으로 이전하겠다는 것을 두고 풍수 때문 아니냐는 민주당발 여론전이 펼쳐졌다. 당선인은 대통령이 참모들과 바로 옆에서 수시로 의견을 교환할 수 있고, 대국민 소통을 위해서도 청와대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강하다고 한다. 하지만 아무리 뜻이 좋다고 해도 성급하다는 여론이 일단 많은 거 같다. 취임 후 당선인의 그 좋은 뜻을 증명하고 무속 논란이 사라지길 기대한다.
맹경환 뉴콘텐츠팀장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