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4월이다. 4월 특히 4월 중순에는 유독 가슴 저리는 기념일이 많다. 세월호 사건, 4·19혁명, 장애인의 날 등이다. 모두 약자와 관련된 일들이다. 이 중에서 장애인의 날과 관련된 일이 최근 이슈가 되고 있다. 돌이켜보니 4월만 되면 기회가 주어지는 대로 장애인 문제를 다루는 글을 썼다. 아마 기회가 주어지는 한, 그리고 장애인 문제가 최소한 수준 이상으로 해결되지 않은 한, 이 일을 계속해 나갈지 모르겠다. 사실 특정 주제로 글을 쓸 때는 문제 제기도 하지만 해결에 대한 소망도 품게 마련이다. 그러나 장애인 문제는 그동안 진전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갈 길이 멀기에 글을 쓰면서도 소망을 품기가 소망스럽지만은 않다.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한국 사회에서 그동안 몇 달을 끌어온 장애인 시위가 다시 시빗거리가 되고 있다. 장애인 이동권에 대해 시민 이동권이라는 맞불까지 거론되는 형국이다. 장애인도 시민인데 말이다. 그리고 문제 해결에 대한 책임 공방은 문제의 기원을 따지는 역사 논쟁으로 번졌는데, 이 역사 논쟁에 의하면 관련된 서울시장들만 해도 진영을 넘나들며 20년 세월에 4번의 시장교체(이명박, 오세훈, 박원순, 오세훈)가 있었다. 시장들의 진영에 관계없이 결국 사안이 종료되지 못한 결과를 낳은 것을 보면, 이념 차이의 문제도 아닌데 말이다. 대체 왜 그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아니 과거는 접어두고라도 최근 시위 현장에 너나 없이 얼굴을 비췄던 사람들은 처음부터 그 일을 일회성 행사로 여겼던 것일까. 그리고 일시적 소강상태마저 피해 당사자인 장애인 시위대가 양보를 하고 장애인 국회의원이 무릎을 꿇어야 가능한 것일까.
이 자리에서 구체적 해결책의 내용을 따지거나 책임 소재를 둘러싼 정치 공방에 끼어들 생각은 없다. 다만 왜 이동권이라는 기본적 시민 권리가 시민이요 교통 약자인 장애인에게 제대로 주어지지 않고 있느냐는 질문을 다시 하려는 것이다. 그것도 20년 세월이 지나도록 말이다. 주목할 것은 한 장애인 당사자가 강조했듯이, 이동권이 없으면 다른 권리도 행사할 수 없기에 이동권은 여타 권리의 전제가 되는 핵심적 권리라는 사실이다. 이 문제는 정치권만이 아니라 한국 사회가 장애인에 대해 지니는 기본적 태도를 다시 묻게 한다.
장애인이 교통상 여러 장애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이미 오래전부터 강조됐고, 그래서 ‘교통 약자’라는 말이 보편적 용어가 됐다. 이동권 문제를 포함해 장애인 문제는 약자의 문제이고, 그래서 우선적 배려가 필요하다는 것을 기본적으로 인식하고 접근해야 한다. 아무리 정치가 표의 논리에 따라 다수를 염두에 둔다고 해도 단순히 다수결이라는 규칙에 따라 승자를 가리는 것으로 끝나는 살벌한 게임이 아니다. 정치는 어디까지나 동물이 아닌 인간의 고유 행위이기에 기본적으로 인간적인, 인간애적인 행위여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정치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는 해당 사회가 ‘약자를 우선 배려하는 사회’가 되도록 고취하고 보장하는 것이다. 그것이 불가능하거나 백안시된다면 그 일은 진정한 정치도 아니고 의의도 없다.
더구나 기독교는 약자를 우선시하는 종교다. 특히 마태복음 25장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을 다양한 약자와 동일시했다. 한국이 기독교 국가가 아니지만 유독 지도층 특히 정치 지도층에 기독교인이 많다. 그런데 기독교 정치인들은 다 어디 갔나. 왜 말들이 없나. 약자를 도외시하는 종교는 기독교일 수 없고, 그런 교인은 기독교인일 수 없다. 한국 사회가 명실상부 선진국이 되는 일은 약자를 배려하는 시각에서 시작된다. 한국의 시민들이 그런 시각을 갖길 바라고, 그 일에는 교회부터 앞장서야 한다.
안교성(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역사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