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복음 19장에는 왕위를 받기 위해 먼 나라로 가게 된 사람이 등장합니다. 이 사람은 종 10명을 불러 각각 한 므나씩 은화를 쥐여주며 돌아올 때까지 장사를 하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왕이 돼 돌아온 그는 한 므나를 땅에 묻어둬 아무것도 남기지 않은 종을 야단칩니다. 므나는 하나님 나라의 생명을 가진 씨앗과 같아서 세상에 심어지면 영광의 열매를 자연스럽게 맺게 됨에도 불구하고, 이 종은 은화를 수건으로 싸두었습니다. 이유는 그의 변명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이는 당신이 엄한 사람인 것을 내가 무서워함이라 당신은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나이다.”(눅 19:21)
종은 주인을 맡기지 않은 것까지 착취해가는 무서운 사람일 거로 생각했습니다. 그 무서움이 이 종으로 하여금 하나님 나라의 풍성함에 참여하는 것을 가로막았던 겁니다. 여기서 주인은 예수님을 의미합니다. 어리석은 종은 율법적으로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율법은 예수님을 무서운 분으로 생각하게 만들고 우리와 예수님 사이를 멀어지게 만듭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끝없이 의를 요구합니다. 그러나 율법이 우리에게 지키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에게는 불가능한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입니다. 율법은 우리에게 두지 않은 것을 취하고 심지 않은 것을 거두어가려고 우는 사자와 같은 분으로 하나님을 의식하게 만듭니다.(벧전 5:8)
하지만 은혜와 사랑으로 오신 예수님은 우리에게 주지 않은 것까지 취하는 무서운 존재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절망을 가장 잘 아는 분입니다. 율법의 요구를 지킬 능력이 우리에게 없음을 잘 알고 계시는 분입니다.
보혈의 값은 공의에 딱 맞는 수준을 넘어 초과 지불됐습니다. 인류 모두가 치러야 할 값보다 더 넘치도록 지불된 것입니다. 구원이 창조보다 나은 이유입니다. 우리의 빈 잔은 채워짐을 넘어 항상 흘러넘치게 되었습니다(시 23:5). 그래서 로마서는 예수님의 은혜가 흘러넘치는 은혜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롬 5:17).
예수님이 선하신 왕이라는 사실을 깨달을 때 은혜가 더 큰 은혜로 깊어지며, 우리와 예수님 사이를 가로막고 있던 모든 두려움이 사라지고 가까워질 것입니다. 성도들은 종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을 아빠라고 부르는 아들의 신분이 됐습니다. 아들은 아빠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우리가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짖느니라.”(롬 8:15)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성도들을 섬기도록 명하셨습니다(눅 17:10). 하나님 나라는 우리의 노력으로 취하고 누리는 나라가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상징하는 요셉과 같이 채색옷을 입고 있습니다. 야곱이 요셉에게 채색옷을 입힌 것은 인간의 땀을 통해서가 아니었습니다.
성도들은 예수님과 떨어서 자신의 노력과 땀으로 하나님 나라를 살아가선 안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에 의지해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는 자들이 돼야 합니다. 우리에게 없는 것을 취하시기는커녕 오히려 우리가 노력하지 아니한 것을 거두게 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보십시오.
우리가 세상 속에서 두려운 이유는 예수님을 두려움의 존재로만 여기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율법 속에 갇혀 있으면 예수님을 두려움으로 대합니다. 어떤 죄와 실패 속에서도 자신을 정죄하거나 책망하지 마시고, 사랑과 넘치는 은혜의 예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은 주저앉은 여러분의 빈 잔을 채우시고, 다시금 세상의 빛으로 일으켜 세우실 것입니다.
차명권 목사(하트교회)
◇하트교회는 국제독립교회연합회에 소속된 교회다. 프랑스와 남아프리카공화국 등 세계 곳곳에 말씀의 공동체를 세워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