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연구자 시선으로 본 그리스·로마 신화

입력 2022-03-31 18:07 수정 2022-03-31 18:08

그리스·로마 신화를 다룬 책은 세계 각국에서 꾸준히 출간된다. 풍부한 이야깃거리를 담고 있을뿐더러 다양한 해석을 통해 현대인의 삶에 던지는 메시지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토머스 불핀치나 구스타프 슈바브의 저서들은 영어와 독일어 문화권의 시각을 전제로 해석한 그리스·로마 신화 책이다. ‘김헌의 그리스 로마 신화’는 국내 연구자의 시선으로 재탄생했다.

목동의 신 판과 아폴론의 악기 연주 대결을 참관하던 미다스 왕은 판의 편을 들었다가 아폴론의 노여움을 사 길쭉한 귀를 갖게 됐다. 저자는 이 이야기를 삼국유사에 실린 신라 제48대 경문왕의 당나귀 귀 설화와 연결했다.

미다스는 길쭉해진 귀를 숨기고 살았지만 자신의 머리를 깎아주는 이발사에겐 숨길 수 없었다. 미다스는 이발사에게 “비밀을 지키지 않으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일렀지만 이발사는 비밀을 참을 수 없었다. 그는 외딴곳으로 가서 땅을 파고 미다스 왕의 비밀을 외친 뒤 흙으로 덮었는데, 그곳에서 자라난 갈대가 바람이 불 때마다 “미다스 왕의 귀는 당나귀 귀”라는 소리를 냈다.

신화 속 인물의 갈등을 통해 생각할 거리를 준다. 저자는 서문을 통해 “영웅이든 신이든 모두 인간 본성을 비춰 주는 거울임에는 변함이 없다”고 밝혔다.

하늘의 신인 우라노스는 자식들에게 권력을 빼앗길까 두려워 대지의 여신 가이아의 자궁 속에 자식들을 가뒀다. 갇혀있던 시간의 신 크로노스는 어머니 가이아에게서 받은 불멸의 낫으로 아버지를 거세하고 권력을 차지한다. 자식이나 후배를 자신의 틀 안에 가두려는 기성세대의 속성을 보여주는 이야기라고 저자는 말한다. 새로운 세대에게 기성세대의 권위와 모순에 겁먹지 말고 과감하게 도전해 새로운 시대와 역사를 열어나가라고 조언한다.

책에서 눈에 띄는 부분 중 하나는 고대 조각상을 그린 세밀화다. 기존의 그리스·로마 신화 책들이 관련 명화나 조각의 이미지를 그대로 실은 것과 다르다. 연필의 질감이 살아있는 이 책의 세밀화들은 신화에 대한 저자의 해석을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데 중점을 뒀다.

저자 김헌은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교수다. ‘지혜를 사랑한다’의 합성어인 ‘필로소피아’라는 말에 이끌려 고대 그리스 철학 연구에 정진하게 된 고전학자다. 서울대 불어교육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철학과에서 플라톤의 ‘파르메니데스’ 연구로, 서양고전학과에서 ‘일리아스’ 연구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대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과 ‘수사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저서로 ‘신화와 축제의 땅 그리스 문명 기행’ ‘천년의 수업’ ‘고대 그리스의 시인들’ 등이 있다. tvN ‘벌거벗은 세계사’, JTBC ‘차이나는 클라스’ 등에 출연해 서양 고전에 담긴 지혜를 알려왔다.

임세정 기자 fish81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