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싸우면서 일하자”… 반공도 노린 새마을운동

입력 2022-03-31 20:53
1972년 사진가 김녕만이 찍은 전북 고창군 한 마을의 새마을운동 모습.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두툼하고 학술적인 책이지만 흥미로운 주장을 담고 있다. ‘냉전과 새마을’이라는 제목부터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요지는 새마을운동이 저개발국가의 근대화 전략만이 아니라 냉전시대 분단국가의 안보 기획이었다는 것이다. “이른바 ‘10월 유신’을 선포한 박정희와 친위세력은 단지 잘살기 운동을 벌이는 새마을이 아니라 새로운 냉전·분단국가체제의 기반이 되는 새마을을 건설하고자 했다.” 새마을운동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자 논쟁적인 주장이다.

새마을운동은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의 유산이지만 현재까지도 긍정적인 평가를 유지하고 있다. ‘잘살아보세’라는 노래와 ‘근면·자조·협동’이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새마을운동은 성공적인 농촌 개발 사업으로, 한국 근대화의 신화로 여겨졌다. 허은(56)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는 새마을운동의 숨겨진 얼굴을 드러내 보이며 이 오래된 신화에 도전한다.

새마을운동은 냉전과 무관했나

저자는 “지금까지 새마을운동과 관련된 새마을의 이미지는 냉전과 분단, 억압적인 지배체제와 절연된 1970년대의 역사상을 그린다”면서 “이는 거대 분단선을 끌어안고 살아야 했던 한국인의 역사와 거리가 멀다”고 비판한다. 또 “1970년대 한국사회, 특히 농촌은 박정희 정부가 동아시아 냉전과는 관계없이 굶주림과 가난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대화의 열망을 분출한 곳으로만 기억되고 있다”면서 이를 “냉전·분단시대라는 역사적인 맥락에서 탈구된 근대화 인식”이라고 지적한다.

70년대 시대상에 대한 이같은 인식의 오류는 새마을운동에 대한 오해 때문이라는 게 저자의 진단이다. 그에 따르면, 지금까지 축적된 새마을운동 연구가 꽤 많지만 개발 영역에 국한해 조명했다는 점에서 차이가 없다. 그래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70년대 한국의 새마을은 동아시아 냉전과 무관한 걸까.

책은 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동아시아의 냉전지역 곳곳에서 농촌지역 개발 사업이 추진됐음을 보여준다. 30년대 일본이 세운 만주국이 국경을 맞댄 소련과 대결하며 추진한 ‘집단부락’, 60년대 베트콩과 전쟁하던 남베트남 정부가 추진한 ‘신생활촌’을 자세히 소개한다. 50년대 영국이 당시 식민지였던 말라야(현 말레이시아)에서 추진한 ‘신촌’도 언급한다.

이런 동아시아의 농촌지역 개발 사업은 안보 목적에서 시작됐다. 공산세력과 대결하는 상황에서 내부 지지마저 취약했던 반공정부 입장에선 안보와 개발을 포괄한 지역재편 정책을 통해 주민의 지지를 얻고 적대세력의 침투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65년 남베트남 정부는 촌락 재건에 대해 “베트콩의 군사활동 및 베트콩의 정치적 조직을 탐지, 제거하는 것이자 촌락의 정치·경제·사회적 발전에 기여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촌락 재건 사업은 군·경·민 합동으로 추진됐으며, 농촌지역을 남베트남 정부에 충성하는 지역으로 바꾸는 게 궁극적인 목적이었다.

1962년 남베트남 정부가 베트콩 침투가 강한 지역에서 추진한 ‘전략촌’ 건설 장면이다. 창비 제공

저자는 남베트남 정부가 추진한 농촌 재편정책이 새마을운동과 매우 흡사하다는 점에 주목한다. “1969년부터 남베트남 정부가 추진한 평정·개발 계획은 박정희 정부가 1970년 4월과 6월 지방장관회의에서 농민의 생활개선과 근대화 욕구의 발전을 논의한 뒤 추진한 새마을운동을 연상시킨다.” 박정희 정부는 72년 새마을운동을 전국적으로 확대하면서 정신 자세로 자조·자립·협동을 강조했는데 “‘자조’와 ‘협동정신’은 ‘자위’(방위)와 함께 남베트남에서 추진된 일련의 농촌 재편계획을 상징하는 용어였다.”

저자는 또 박정희 정부의 핵심부를 이룬 군인들이 만주군 활동이나 베트남전 참전을 통해 이들 지역에서 추진된 지역재편 사업을 습득했고 이를 한국에 새마을이란 이름으로 이식했다고 본다. “만주국에서 군인과 경찰로서 제국의 방공전사로 복무한 조선인들은 농촌안정을 위해 ‘폭력적인 비민분리와 적대세력 배제’-‘보갑연좌제 및 특고망으로 구성된 중층적인 감시체제 작동’-‘농촌안정을 위한 부흥정책 추진’으로 구성되는 일제·만주국의 농촌지배 전략을 체득한 이들이었다.”

새마을운동은 안보 기획이었다

저자는 30년대 만주국 농촌, 50년대 말라야 신촌, 60년대 남베트남 신생활촌이 70년대 한국의 새마을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새마을운동의 새 그림을 그려낸다. ‘냉전의 새마을’이 그것이다.

박정희 정부가 1968년 1·21사태 이후 향토예비군 중심의 마을 방위체계를 확립하기 위해 충북 청주시 미원면에 조성한 ‘표준방위촌’이다. 대한민국역사박물관 제공

냉전지역에서 농촌지역 개발 사업은 대공 전략적 차원을 갖고 있었다. 농촌은 안보 불안지역이었다. 빈곤이 심했고 공산세력의 침투에 허약했다. 저자는 북한 무장 게릴라들이 청와대를 습격하러 침투한 68년 1·21사태를 계기로 박정희 정부의 근대화 노선이 기존의 경제제일주의에서 경제·사회 개발계획과 국가안보 계획을 포괄하는 것으로 확장됐다고 분석한다. “1960년대 말 남북한 긴장관계의 고조는 농촌사회 재편 방향에서 안보 영역의 비중이 빠르게 확대되는 계기로 작용했다.”

박정희 정부는 분단국가 지배체제의 안정을 흔들 여지가 있는 원인을 제거하기 위해 ‘냉전의 새마을’을 건설했다. 마을을 반공국가의 기반으로 재편하는 게 핵심이었다. 그것은 30년대 만주에서, 60년대 베트남전에서 배운 것이기도 했다. 동네마다 이장과 동장을 대공요원화하고 대공정보망과 대민감시망을 구축했다. 반상회 정례화, 5가구조 감시체계, 민방위대 설치 등도 새마을의 이름으로 추진했다.

새마을운동은 초가지붕이 슬레이트 지붕으로 바뀌고 마을 길이 넓어지고 신작로가 포장되는 농촌 부흥 사업이었지만, 개발과 안보를 명분으로 한 총동원체제, 주민이 서로 감시하고 경찰이 다시 감시하는 중층적 감시체제이기도 했다. 진정한 주민자치는 지체됐고 민주주의와 인권은 위협을 받았다.


책은 새마을운동의 전모를 동아시아 냉전의 맥락에서 새로 탐구해 신화를 해체하고자 한다. 새마을운동을 안보 기획으로 재고찰하는 것은 유신체제가 주도한 70년대를 근대화를 위한 열망으로 이해하는 인식에 균열을 낸다. 우리 공동체에 깊숙이 박혀 있는 냉전 논리의 잔재를 다시 돌아보게 한다. 체제경쟁의 승리를 위해, 이념의 우월함을 입증하기 위해 비인간화를 강요하는 논리를 우리가 용인하는 게 아닌가, 분단체제 속에서 더 자유롭고 더 인간적인 공동체를 위한 꿈이 짓눌려 있는 게 아닌가, 이런 질문을 해보게 한다. 올해는 72년 유신체제가 등장한 지 50년이 된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