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독의 무덤’에서 살아남은 벤투… “이제 카타르다”

입력 2022-04-02 04:08
한국 남자 축구대표팀 파울루 벤투 감독이 지난 28일(현지시간) 카타르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이 열린 아랍에미리트(UAE) 두바이 알막툼 스타디움에서 훈련을 지도하고 있다. 대한축구협회 제공

한국 남자축구대표팀 사령탑은 감독들의 무덤이라고 불렸다. 1948년 런던올림픽을 앞두고 처음으로 대표팀이 구성된 이후 80차례나 감독이 바뀌었다. 평균 재임 기간이 1년이 채 안 된다. 한 명의 감독이 여러 차례 감독직을 수행한 점을 고려해도 50명이 넘는 이들이 대표팀을 거쳐 갔다.

70년대부터는 임기를 정했지만, 기간을 모두 채운 감독은 찾기가 힘들다. 98년 프랑스월드컵 이후에는 한 명의 감독이 예선부터 본선까지 대표팀을 이끈 사례가 없다. 이유는 다양했다. 성적이 부진했을 때는 물론이고 감독을 향한 비난 여론이 일 때도 과감하게 교체 카드를 쓴 탓이다. 박수를 받으며 물러난 감독도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대표팀을 4강으로 이끈 거스 히딩크 감독을 제외하곤 딱히 없다.

하지만 제80대 감독인 파울루 벤투 감독이 부임한 이후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그는 역대 최장수 사령탑에 이름을 올린 데 이어 단일 재임 기간 최다승 등 역대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자연스레 2022 국제축구연맹(FIFA) 카타르 월드컵 본선에 대한 기대감도 높아지고 있다.

벤투호 출발은 ‘기대반 우려반’

벤투 감독은 2018년 8월 22일 부임했다. 포르투갈 대표팀 감독으로 2012 유럽축구선수권대회(유로2012)에서 팀을 3위로 이끈 점, 스포르팅 CP 시절 컵대회 우승을 차지한 점 등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김판곤 국가대표 감독 선임위원장은 “훈련 내용 등 기술적인 자료를 점검한 결과 한국 축구를 발전시킬 수 있는 감독이라 생각했다”고 설명했다.

벤투 감독은 부임 기자회견에서 아시안컵에서 좋은 성적과 2022 카타르 월드컵 본선 진출을 목표로 제시했다. 축구 철학에 대해선 “점유율을 통해 경기를 지배하고, 최대한 많은 기회를 창출하는 축구를 하고 싶다. 수비적으로는 언제, 어디서, 어떻게, 어떤 강도로 상대를 막을지 고민하겠다”며 “90분 동안 끊임없이 뛰며 공격적으로 플레이하는 팀을 만들겠다”고 했다.

부임 당시엔 여론이 그리 좋진 않았다. 바히드 할릴호지치, 카를로스 케이로스, 알베르트 셀라데스 등 국가대표팀 신임 감독 후보로 거론되던 이들에 비해 명성이 낮다는 비판과 함께 ‘장고 끝에 악수’라는 말까지 돌았다. 크리스티아누 호날두가 포함된 포르투갈을 이끌고 2014년 브라질 월드컵 조별리그에서 탈락했다는 점과 그가 경질된 이후 포르투갈이 유로2016에서 우승한 점 등을 언급하며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직전 중국 무대에서 실패한 이미지도 부정적인 평가를 부추겼다.

여론의 기류가 바뀌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벤투 감독은 부임 후 20일도 채 안 된 시점에 치른 평가전에서 코스타리카와 칠레라는 강호를 상대로 1승 1무를 거뒀다. 벤투 감독을 향한 기대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어진 FIFA 랭킹 5위 우루과이전에서 화끈한 공격 축구를 선보이며 36년 만에 승리를 거두자 59년 만에 아시안컵 정상 탈환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까지 나왔다.

벤투호는 기대를 한 몸에 받으며 2019 아시아축구연맹(AFC) 아랍에미리트(UAE) 아시안컵에 출전했다.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강팀을 상대로 효과를 본 점유율을 유지하며 후방부터 공격을 전개해 나가는 ‘빌드업 축구’를 갖고 나섰지만, 극단적 수비로 임하는 아시아팀들을 상대로 고전했다. 그해 1월 카타르와 8강전에선 0대1로 패했다. 벤투 감독으로선 부임 후 11경기(7승4무)만에 당한 첫 패배였지만, 한국 대표팀으로는 15년 만에 아시안컵 4강 진출에 실패한 것이었다.

벤투 감독은 탈락 직후 “이번 대회에서 선보인 경기력보다 득점이 부족했던 것은 사실이다. 빌드업 과정이 느렸고 공격작업도 비효율적이었다”면서도 “앞으로도 지금의 플레이 스타일을 바꾸지 않고 유지할 생각”이라고 했다.

아시안컵 탈락 충격 이후 세대교체

지난 21일 파주NFC에서 훈련중인 선수들을 지켜보는 벤투 감독. 연합뉴스

아시안컵 이후 대표팀엔 변화가 생겼다. 중심을 잡던 기성용과 구자철이 은퇴를 선언했다. 세대교체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벤투 감독은 2019년 3월 소집 때 권창훈 이강인 백승호 등을 발탁했다. 손흥민을 최전방 공격수로 세우는 등 전술의 변화도 시도했다.

부임 때부터 강조해 온 빌드업 축구를 이식하기 위해서도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는 선수들에게 훈련 때마다 공을 소유한 채 원투 터치로 공을 주고받을 것, 공 소유권을 잃은 뒤엔 강한 압박을 통해 다시 빼앗아 올 것을 주문했다.

벤투 감독은 2019년 동아시안컵 우승을 차지하면서 반등에 성공했다. 해외파 없이 구성된 팀이었지만, 숙적 일본을 이기고 국제대회 우승을 차지했다. 최초 3전 전승 우승팀이자 첫 개최국 우승이라는 기록도 작성했다.

우여곡절도 있었다. 코로나19 팬데믹 발발 이후 평가전조차 치르기 어려웠다. 2020년 A매치라고 해봐야 멕시코·카타르와 치른 친선경기가 전부였다. 선수들을 점검하고 전력을 다져야 하는 감독 입장에선 어려울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급기야 지난해 3월 열린 한·일전에서 0대 3 완패를 당하며 비난 여론도 커졌다. 이례적으로 대한축구협회 회장이 사과문까지 발표했다.

벤투 감독이 고집해 온 빌드업 축구는 월드컵 최종예선을 치르면서 어느 정도 뿌리 내린 모습을 보여줬다. ‘원정팀의 무덤’으로 불리는 이란 원정에서 1대 1 무승부를 기록하는 등 뛰어난 경기력을 보인 대표팀은 8경기 만에 카타르월드컵 진출을 확정 지었다. 특히 홈경기로 치러진 이란과 경기에서 2대 0 승리를 거둔 건 백미로 꼽힌다. 11년 만에 이란을 상대로 거둔 승리였다.

덕분에 벤투 감독은 단일 재임 기간 최다승 사령탑에 이름을 올렸고, 홈경기 20경기 연속 무패 기록도 달성했다.

숙제도 남았다.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인 UAE와 경기에선 무기력한 경기력으로 0대 1 패배했다. 조 1위는 물거품이 됐다. 벤투 감독은 “최악의 경기력이었다. 결과뿐 아니라 경기력과 태도 모두 실망스럽다”며 “이 같은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하겠다”고 했다.

유종의 미를 거두지 못했지만, 벤투호는 본격적으로 카타르월드컵 본선 무대를 준비한다. 손흥민이 “아직 완성체가 된 것은 아니다. 월드컵에 나갈 때까지 더 완벽한 완성체가 되는 게 목표”라고 한 만큼 남은 기간 부족한 점을 보완해 나갈 것으로 보인다.

벤투 축구가 카타르월드컵에서 어느 정도 기량을 보일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팬들 사이에선 역대급 성적을 기록 중인 벤투호가 남아공월드컵을 넘어 12년 만에 원정 월드컵 16강을 이룰 것이라는 기대가 커졌다.

허경구 기자 ni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