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만 루슈디 소설 ‘한밤의 아이들’을 아무 정보 없이 읽기 시작하면 “이게 소설인가?” 하고 고개를 갸웃할 수도 있다. 인도 현대 역사를 배경으로 하는 이 소설은 시점이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어지럽고, 소설에서는 흔히 볼 수 없는 문장부호 콜론(:)이 여기저기 등장하는가 하면, 혼잣말처럼 중얼중얼 읊조리다가, 요약하듯 내용을 후딱 정리하고 넘어가 버리기도 한다. 그런 때문인지 일반적으로는 소설 끝에 등장하는 ‘작가의 말’이 맨 앞에 수록돼 있다. 출판사에 원고를 건넸을 적 사연을 소개하고 있는데 원고를 처음 검토한 관계자께서 하셨던 말씀. “이 작품의 작가는 소설 형식을 제대로 익힐 때까지 단편소설에 집중해야 한다.” 뜻인즉 ‘좀 더 연습하고 다시 찾아와’라는 냉랭한 거절이다. 천만다행으로 다른 관계자가 원고에 열광적 반응을 보였고, 영국 부커상을 세 번이나 받은 천재적 작품이 독자들을 만날 수 있게 됐다.
문학계에 이런 이야기는 흔하다. ‘해리포터’ 시리즈가 숱한 출판사에서 퇴짜를 맞았다는 사연은 ‘인류가 저지른 세기적 실수’를 꼽을 때 순위에 빠지지 않는다. 미국인들이 성경 다음 좋아하는 책으로 꼽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경우는 사연의 빛깔이 약간 달라, 작가가 자신 없어 출간하지 않던 원고를 그의 집에 들른 편집자가 우연히 발견해 세상의 빛을 본 케이스다. 조지 오웰의 ‘동물농장’도 여러 출판사에서 거절당했다. 당시 영국 지식인 사회에 좌파 성향이 많아 소재 자체에 거부감을 보였고, 출간한들 상업적으로 성공하지 못할 것으로 예상했다고 한다. 한편 당시 소련은 연합국의 일원이었으니 스탈린을 지나치게 비난하는 내용이 국제적 연대를 저해할 수 있다는 이유로 영국 정보 당국이 출판사에 압력을 넣었다는 설명 또한 있다. 오죽했으면 오웰은 자기 돈을 털어 출판할까 궁리했다고도 한다. ‘동물농장’은 1945년 8월 17일 출간되었고, 시대를 뛰어넘는 명작으로 널리 사랑받고 있다.
이쯤 되면 “편집자라는 사람들이 작품 보는 눈이 그렇게 없어서야” 하면서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들린다. 지독히 아둔하고 운 없는 사람쯤으로 비웃는 표정 또한 보인다. 그러나 시간과 장소를 바꾸어 내가 ‘한밤의 아이들’을 처음 검토한 출판사 관계자라 한들 “나중에 부커상을 받을 만한 작품이로군요” 하고 평가할 수 있었을까? ‘해리포터’ 원고를 읽고 나서는 “시장에서 어떤 독자층도 만족하지 못하겠습니다”라고 짐짓 전문가 느낌의 쪽지를 붙여 J K 롤링이라는 무명 작가에게 돌려보냈을 것이다. 트렁크 하나를 가득 메웠다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어수선한 초고는 또 어땠을까? 예민한 시기에 정치적 논란이 분명한 ‘동물농장’을 세상에 내놓을 배짱 역시 없었을 것이다.
세상에는 범인들이 “이게 작품이야” 하면서 무시하고 밀어내는 것에서 가능성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의 밝은 눈과 총명함에 감사하고 존경하는 한편으로 ‘거절한’ 이들을 위한 변명 또한 덧붙이지 않을 수 없다. 위대함을 발견하지 못하는 평범한 눈을 애석하게 생각할 수는 있겠으되 대체로 사람은 시대적 평균치의 수준에서 세상을 바라보기 마련이다. 자신이 그 자리에 있었어도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들에 대해 지나치게 손가락질하는 사람들을 보면 우리 안에 내재한 가식이나 오만은 아닐까 돌아보기도 한다.
평균이나 평범을 나무랄 수는 없다. 그것이 있어 세상은 안정을 이루는 측면 또한 존재한다. 물론 거절당할 것이 분명한데도 오늘도 열심히 부딪치고 있는 그 숱한 용기와 도전을 가장 많이 격려하고 위로해줘야겠지. 그렇다고 거절을 너무 미워하지는 말기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마지막 대사처럼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뜰 테니까.
봉달호 작가·편의점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