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꽃세권

입력 2022-03-30 04:07

역세권으로부터 진화한 조어가 슬세권, 숲세권, 공세권, 맥세권, 스세권, 몰세권, 올세권까지 끝 간 데 없다. 자기 삶터를 꼼꼼히 살피고 사랑하고 싶다면 꽃세권도 좋겠다. 간혹 걷다가 만난 꽃에서 봄을 확 느끼는 경우가 있는데 목련이 대표적이다. 크고 탐스러운 꽃이 가득 핀 목련을 딱 마주치면 봄이 훅 들어옴을 느낀다. 산수유 그 참하고 또 노오란 꽃이나 짙은 향기로 먼저 고개를 들게 하는 매화도 그렇다. 그 뒤를 잇는 건 살구꽃과 벚꽃과 개나리, 철쭉에 라일락(수수꽃다리)이고, 화려한 장미에 고봉밥 같은 이팝나무 가로수 흰 꽃이 흐드러지면 봄이 다한다. 산자락과 이어진 동네라면 생강나무와 진달래와 조팝, 산벚과 철쭉을 지나 아카시아(아까시나무) 향기를 맡으면 이내 여름인 셈. 이렇게 동네마다 지도와 달력과 향기를 엮으면 입체적 꽃세권이 만들어진다.

우리 동네는 최근 봄꽃 명소가 추가됐는데 안국동 옛 풍문여고 자리에 문을 연 공예박물관 마당이다. 커다란 매실나무 16그루가 새로 자리 잡았는데 금주 내내 매화가 만개한다. 마당이 다 환하고 향기가 넘실댈 정도. 재동 윤보선 가옥은 꽃이 넘쳐 담장 밖도 꽃세권인데 홍매가 봄을 열면 온갖 꽃들이 흐드러지고, 여름라일락이라 불리는 개회나무 꽃향기로 봄을 닫는다. 그사이 감사원 벚꽃놀이도 다녀와야 하고 경복궁 창덕궁에 정독도서관 원서공원까지. 좀 멀어도 덕수궁 석어당 살구꽃은 잊지 말아야 한다. 와룡공원 주위 아까시꽃이 피면 이젠 사라진 성너머집을 아쉬워하며 봄을 떠나보내는 식이다.

겨울 가뭄이 깊어 첫 봄소식을 알리던 매화나 산수유는 3주가량 늦었지만 벚꽃과 함께 봄이 본격 시작된다. 여의도, 남산, 석촌호수, 안양천 등 유명한 벚꽃 명소도 좋겠지만 팬데믹의 막바지 파고도 감안해 동네 구석구석 꽃세권을 분석해보면 좋겠다. 벚꽃 말고도 철모르고 두서없이 피어날 봄꽃들 이름도 불러주고, 지도와 달력에 기록해도 좋겠다. 그렇게 꽃세권에 살자!

온수진 양천구 공원녹지과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