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와 발버둥의 시간… 우리는 굽히지 않고 나아간다”

입력 2022-03-29 03:03 수정 2022-03-29 17:24
지난달 24일 오전 4시(현지시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이 시작됐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우크라이나 국민은 각자의 위치에서 부당한 전쟁을 온몸으로 이겨내고 있었다. 정치인은 수도 키이우(키예프)에 남아 국제사회에 평화를 호소했고, 하르키우의 한국인 선교사는 주민을 돌봤다. 조국을 떠난 이들은 구호품을 들여보내고, 러시아의 침공 사실을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힘썼다.

‘180도 달라진 삶’을 살고 있다는 이들은 우크라이나를 도운 한국과 한국교회에 감사의 마음을 전하며 평화를 위해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

공포와 발버둥의 시간

안드레이 니콜라엔코 의원.

우크라이나 야당 국회의원인 안드레이 니콜라엔코(43) 의원은 연세대 어학당 출신의 대표적 친한파 정치인이다. 그는 키이우에 남아 정부를 돕고 있다. 니콜라엔코 의원은 “지난달 24일 이후 우리의 삶은 180도 바뀌었다”며 “전 세계도 군사대국이 독립된 국가를 공격했다는 걸 알게 됐다. 다음 타깃은 누가 될지 모른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침공 이후 한 달의 시간을 ‘공포(Anxiety)’와 ‘발버둥(Struggle)’으로 정의했다.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더 이상 내 곁에 없어요. 외신이 러시아 폭격으로 아이와 임산부가 사망했다는 소식을 전할 때 저는 친구를 묻고 있었습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닐 겁니다.”

두려움 중에도 그는 “우리는 굽히지 않고 물러서지도 않을 것”이라며 “(나는) 한국교회와 한국이 우리를 누구보다 이해하며 응원할 거라 확신한다”고 말했다. 이어 “더 많은 도움이 필요하다. 아이들의 미래를 위해, 집으로 돌아갈 권리를 위해 싸울 수 있도록 힘을 주고 기도해 줬으면 한다”고 덧붙였다.

식료품 나누고 발전기 돌리고

서진택(왼쪽) 선교사.

우크라이나 북동부 하르키우에서 사역하는 서진택(30) 선교사는 12살 때 선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우크라이나에 왔다. 2013년 우크라이나 여성과 결혼했고 아버지 뒤를 이어 선교사로 현지 사역 중이다. 그에겐 아버지의 묘가 있고 아내와 두 아들, 처가 식구가 있는 이곳이 사실상 고향이었다. 외교부의 여행경보 4단계에도 ‘예외적 여권사용 등의 허가’를 받아 남았다.

한 달을 버티게 한 힘을 묻자 서 선교사는 많은 분의 기도와 후원, 우크라이나를 사랑하는 마음, 전쟁 중에 함께하시는 주님을 꼽았다.

“하루하루 살아가는 게 모두 주님의 은혜입니다. 먹을 걸 풍성하게 채워주셔서 성도들과 주변 사람에게 나눠주고 있고, 최근 전기가 끊겼을 땐 다른 도시에서 발전기를 가져와 닷새 만에 전원을 켜기도 했어요.”

확전 가능성은 걱정할 부분이다. 서 선교사는 “형제나라 러시아 군대가 하르키우 외곽도로를 봉쇄하면 식료품 공급이 단절될 수 있다”면서 “두려움이 커지고 생각은 많아졌지만 제자리에서 가족과 성도, 주변 사람의 위로가 되고 싶다”고 강조했다.

기도제목을 물으니 그는 “모두가 우크라이나를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러시아, 한국을 위해서도 기도해 달라”고 강조했다.

매일 아침이 두려워요

안나 티테녹씨.

안나 티테녹(31)씨는 지난 한 달간 가장 무서운 게 밤사이 일어난 뉴스를 확인하는 ‘매일 아침’이라고 했다. 티테녹씨는 2012년 한국에 와 한양대 국제학대학원 한국학과를 졸업했다. 현재 연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그녀는 올 초 고향인 우크라이나 서부 흐멜니츠키주 카미야네치포딜스키에 갔다.

그녀는 “그때만 해도 저뿐만 아니라 어느 누구도 지금의 상황을 상상도 못 했다”며 “오히려 자유를 최고의 가치로 두고 미래를 향해 성장하는 우크라이나의 희망을 봤다”고 떠올렸다.

그러나 러시아 침공으로 모든 게 달라졌다. “우리 고향은 그나마 안전한 곳인데 사이렌이 계속 울리고 대피소에서 보내는 시간도 많다고 해요. 지금 우크라이나에서 안전한 곳이 있을까요.”

그녀의 가족, 친구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역할을 하고 있다. 티테녹씨는 “아버지는 피란처로 전환된 학교에서 피란민을 지원하고 있고, 친구들은 구호품 운송을 돕고 있다”고 전했다.

그녀 역시 한국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걸 하고 있다. 일주일에 한 번 주한 우크라이나인 공동체와 함께 반전 시위를 하고 있고, 우크라이나의 인도적 지원 방법을 홍보하는 동시에 러시아 침공의 부당함도 알리고 있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교인인 그녀는 응원과 기도를 부탁했다. “우크라이나와 한국 국민이 가장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자유, 민주주의, 평화를 지키도록 기도해 주셨으면 합니다.”

구호품 보낸 지 한 달

카터이나 마리니나씨(오른쪽).

대학 4학년생 카터이나 마리니나(27)씨는 지난 9일(현지시간) 루마니아 수체아바주 수체아바시 대형마트에서 이불, 통조림 등을 구매해 수십 개 박스에 담았다. 차량에 박스를 싣고 그녀는 우크라이나 체르니히우와 빈닌차로 갔다.

키이우 국립언어대학 한국어과 4학년인 마리니나씨는 지난달 한재성 선교사 가족과 함께 피란길에 올라 불가리아에 왔다. 이후 한국교회의 도움을 받아 한 선교사와 불가리아·루마니아 한인 선교사가 확보한 구호품을 우크라이나로 보냈다.

그녀는 “우린 어느 때보다 힘든 한 달을 보냈지만 하나가 됐다. 나 역시 몸은 우크라이나 밖에 있지만 영혼은 그렇지 않다는 걸 알게 됐다”고 전했다.

5월이면 전쟁이 끝날 것이라는 희망 섞인 바람도 전했다. 마리니나씨는 “우리가 이길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는 우크라이나를 사랑하며 그들(러시아)의 승리를 절대 허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라며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싸우고 계시다는 걸 느낀다. 우크라이나로 돌아가고 싶다”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