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카도 매료’ 젤렌스키, 소프트파워로 푸틴에 압승

입력 2022-03-29 00:04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왼쪽 사진)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 AFP·AP연합뉴스

27일(현지시간) 미국 로스앤젤레스 돌비극장에서 열린 제94회 아카데미상 시상식에는 지금 세계에서 가장 바쁘고 위험한 직무를 수행하는 한 남자가 영상으로 등장할 뻔했다. 군용 티셔츠 차림의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 말이다.

그러나 마지막 순간 시상식 주최측은 이미 녹화된 젤렌스키 대통령의 영상을 무대에 올리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정치화에 반대한다는 주장이 우크라이나인의 비극을 막아야 한다는 반론을 간발의 차로 이겼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녹화분 영상에서 “영화인 여러분, 우리 모두가 유명해지고 싶어하지만, 유명해지는 방법에도 정도가 있습니다. 세상 모든 사람이 존경할 만한 방법 말입니다”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침공으로 조국이 전쟁에 휩싸여있지만, 한마디의 정치적 언사도 없었다. 영상을 미리 봤던 미국 유명 코미디언 완다 사이키스는 “근데 저분 진짜 바쁘지 않나요? 사방으로 적들에 포위돼 있을 텐데”라고 농담을 했고, 동료 배우들은 폭소를 터뜨렸다고 한다.

젤렌스키는 우크라이나 정치코미디쇼의 주연 배우이자 시나리오 작가, 제작자로 유명해졌다가 2018년 대통령에 당선된 인물이다. 수백년째 이 나라에 정착한 유대인 혈통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전쟁 이전까지 그저 코미디언 출신 대통령이라는 비아냥을 받았던 그의 정치 이력은 지난달 24일 시작된 러시아 침공 때부터 빛을 발했다. 군용 티셔츠 차림으로 매일 결사 항전을 독려하며 공개 메시지를 던지면서 “국민 영웅”으로 추켜세워졌기 때문이다.

세계 최대 스트리밍서비스업체인 넷플릭스는 미국 유명배우이자 감독인 숀 펜이 만드는 우크라이나전쟁 다큐멘터리 방영을 예고해 놓은 상태다.

지금 젤렌스키의 이미지는 ‘전쟁광·독재자=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반대의 자리에 위치한다. 세계적인 예술가들은 심지어 러시아 국적인 인사까지 포함해 러시아 규탄 대열에 가담하고 있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이날 젤렌스키 대통령이 조국의 전쟁을 진두지휘하며 우크라이나인뿐 아니라 전 세계인을 러시아 규탄 대열에 동참시키고 있다며 “그야말로 그의 존재 자체가 소프트파워의 힘”이라고 보도했다.

NYT는 이어 “우크라이나 정부의 현명한 대러시아 전략이 실제 전장에서뿐 아니라 문화 영역에서도 극적인 효과를 낳았다”면서 “천년을 이어온 우크라이나의 대러시아 저항 역사를 담은 콘텐츠가 유튜브의 인기 콘텐츠가 될 정도”라고 전했다.

신창호 선임기자 proco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