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 러시아의 ‘기술적’ 부도 위기

입력 2022-03-29 04:06

러시아가 국가 부도에 내몰리고 있다. 러시아는 경제 제재로 인해 에너지 광물자원 등의 수출이 막히고, 경제가 급격히 침체되고 있다. 러시아에 진출한 다국적 기업들의 사업 철수가 이어지고 있고, 루블화 가치가 폭락하면서 외국인 자금이 순식간에 빠져나가고, 외화채무를 갚을 능력도 상실해 가고 있다. 러시아의 금융시스템은 기능을 상실한 모습이다. 모스크바 거래소는 증권 및 파생상품 거래를 중단했고, MSCI는 러시아를 신흥국 시장에서 제외했다. 러시아 은행들은 대규모 예금인출 사태를 겪고 있고, 국제 신용평가사들은 러시아 국가신용등급을 투자부적격 등급으로 강등시켰다.

러시아의 국가 부도, 오는가? 안 오는가? 많은 전문가의 주장이 엇갈린다. 러시아가 경제적으로 매우 위험한 상황임에는 이견이 없지만 국가 부도가 실제 올 것인지 아닌지에는 양론이 존재한다. 주요국의 국가 부도는 그 영향이 주변국뿐 아니라 세계에 작용하기 때문에 정확히 진단하고 대응책을 모색할 필요가 있다. 국가 부도는 크게 세 가지 경로로 온다. 첫 번째 경로는 모라토리엄이다. 한 국가가 외국에서 빌려온 차관의 상환을 일시적으로 연기하는 것을 뜻한다. 두 번째 경로는 디폴트다. 채무상환 유예를 선언하는 모라토리엄과 달리 디폴트는 국채 만기가 도래했지만 상환할 능력이 없는 채무불이행 상태를 가리킨다. 세 번째 경로는 국제 신용평가사가 국가신용등급을 기술적 부도(selective default) 등급으로 강등하는 경우다.

러시아는 엄밀히 국가 부도 상황과는 차이가 있다. 먼저, 러시아가 달러 표시 부채를 갚을 능력이 있다는 면에서 모라토리엄과는 거리가 있다. 둘째, 러시아가 3월에도 국고채 상환 및 이자 비용 지급을 씨티그룹을 통해 이행했고, 금융제재에서도 예외 사항이다. 금융제재 예외사항에서 제외된다고 하더라도 일반적인 디폴트가 아니다. 러시아는 채무상환을 이행할 것이고, 서방의 금융기관이 채권자에게 전달하지 않는 상황이 될 것이다. 셋째, 국제 신용평가기관인 S&P, 무디스, 피치가 러시아의 국가신용등급을 각각 투자부적격 등급인 CC, Ca, C로 강등했다. 이는 디폴트 상황 전 단계이고, 신용평가사들은 채무불이행이 이뤄진 뒤 한 달의 유예기간을 준 뒤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디폴트 선고를 내린다. 따라서 러시아가 국가 부도 상황에 놓일 가능성은 낮은 편이다.

러시아의 기업 부도는 어떠한가? 국제 주요 신용평가사들은 러시아 기업들의 신용등급을 강등하고 있다. 최대 철강기업 세베르스탈은 이자 지급 마감일이 3월에도 있었고, 4월 17일에 또 도래한다. 러시아 최대 금광업체 폴리우스도 2016년 발행한 채권의 원리금 상환일이 3월 28일이다. 러시아 최대 다이아몬드 업체 알로사도 4월 9일 이자를 상환해야 한다. 러시아 기업들의 채무불이행 역시 금융 제재로 인한 것이다. 갚을 능력이 없어서가 아니라 갚지 못하게 막고 있기 때문이다. 채무자는 이자를 송금했지만 채권자가 받지 못하고 있다. 미국 투자자에게 달러채 이자의 지급과 송금을 대행하는 금융사는 미국 재무부로부터 명시적인 허가를 받아야 한다.

러시아는 ‘기술적’ 국가 부도 위기다. 즉, 러시아의 국가 부도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할 것인지,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금융제재가 확대될 것인지 등 지정학적 리스크에 달려 있다. 과도한 안전불감증도 안 되고, 과도한 불안감 조성도 안 된다. 러시아의 국가 부도가 발생하면 세계 경제 충격으로 연결될 수 있다. 러시아가 기술적 국가 부도에 처할 가능한 시나리오를 계산하고 기민하게 대응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김광석 한국경제산업연구원 경제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