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국에 간 어떤 사람 이야기다. 금은보화로 장식된 으리으리한 집에 시중드는 하인 수천 명이 그를 맞았다. 이제 영원히 손 하나 까딱 안 하고 왕처럼 살 수 있겠구나! 기쁨은 잠시였다. 일주일이 지나자 심심해 견딜 수가 없었다. 뭐라도 하고 싶었으나 하인이 앞을 막아섰다.
“뭐든 원하면 다 해드립니다. 단 당신이 직접 하는 것만은 안 됩니다.”
“그럼 난 차라리 지옥에 가서 살겠소!”
“주인님, 이곳이 천국인 줄 아셨나요? 여기가 바로 지옥입니다.”
이어령의 ‘메멘토 모리’에 나오는 21세기 버전 천국 이야기이다. 생각해보면 지루한 것만큼 인내하기 힘든 것도 없다. 오죽하면 배고픈 건 참아도 심심한 건 못 참는다는 말이 나왔을까. 그러고 보면 예술을 포함해 우리가 하는 모든 행위가 지루함과 고루함에서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인지도 모른다. 저자는 부딪치고 싸우고 피를 흘리면서도 그 고난 속에서 참된 의미를 찾는 곳이 천국이라 말하며 자문자답으로 글을 맺는다. 세상에서 제일 재미없게 사는 사람이 누굴까. 모든 걸 성취한 사람이다. 최고 자리에 오른 이에겐 더 갈 곳이 없다. 아이들에게 가장 힘든 일은 뭘까. 심심함이다. 지루함이다. 오늘날 교회가 아무것도 기대할 수 없는 지루하고 고루한 공간으로 인식되어 가는 것은 참으로 슬픈 일이다.
흥미로운 것은 위기의 시대일수록 천국 이야기가 대중의 단골 메뉴로 등장한다는 점이다. 기독교에 대한 위기감이 절정에 달했던 르네상스 시대에도 천국과 지옥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 유럽 대중에게 사랑을 받았다. 단테의 ‘신곡’이 그렇다. 우리말로 풀면 ‘거룩한 노래’라는 뜻이다. 지옥에서 연옥을 거쳐 천국을 다닌 7일간의 여행기를 시로 쓴 문학작품이다.
이 작품의 압권은 첫 출발이 되는 지옥문에 새겨진 문구다. “지옥에 다다른 자여, 모든 희망을 버려라! 영원히!” 마지막 여행 코스인 천국은 전혀 달랐다. 빛과 환희로 가득 찬 다채로움의 세계였다. 아무것도 꿈꿀 수 없는 배타적이고 폐쇄된 세계가 아니라 누구나 꿈꿀 수 있는 포용적이고 열린 세계 그 자체였다. 지옥과 천국을 모두 맛본 주인공이 마지막 귀착지인 현실로 돌아와 내린 결론은 가히 놀랍다. “지옥은 항상 우리 곁에 있을 것이다. 그러나 끝까지 희망을 놓지 말자. 그것이야말로 지옥을 지옥답지 않게 만드는 길이다.”
인생의 반 고비인 30대 중반부터 19년간 이어진 망명길에 올라 현실에서 천국과 지옥을 모두 맛본 단테! 그의 ‘신곡’은 12년에 걸쳐 쓴 세기의 작품답게 교회가 왕좌를 차지한 중세 유럽의 모순된 사회적 현실을 적나라하게 담았다. 그러나 신곡의 위대함은 날마다 지옥인 현실을 보여주는 데 머무르지 않는다. 오히려 빈약한 이들이 모여 사는 인간 사회에 대한 연민과 공감으로 짜이는 ‘공동체의 평화’를 말한다. 하나님의 섭리는 인간 없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실천을 통해 완성되는 것임을, 단테는 자신의 인생 체험을 통해 말하고 있다.
이는 분명 놀라운 통찰이다. 하지만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겐 그리 낯설지 않다. 전 세계를 지옥문 앞에 줄 세우고 종교조차 입 다물게 했던 나치 시대, 죽음의 골짜기에서 살아 돌아온 생존자 한나 아렌트도 이런 말을 했다. “인간은 죽기 위해 태어난 것이 아니라 시작하기 위해 태어난 것이다.” 죽음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정지된 시간이 아니다.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창조적인 시간이다. 교회가 스스로 죽여왔던 종교의 생명력과 회복력을 되찾기에도 더없이 좋은 시간이다. 봄에 새로 피어나는 갖가지 채소와 화초가 선물하는 다채로움과 균형감이 우리에게 천상의 교과서가 되어줄 것이다.
하희정 감신대 객원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