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아는 지난해 러시아에서 자동차 20만5801대를 팔았다. 전체 2위다. 현대자동차는 17만1811대를 팔았다. 3위다. 수많은 글로벌 기업이 러시아를 떠나고 있지만 현대차·기아는 쉽게 손절하지 못하는 이유다.
그렇다면 러시아 자동차 시장 1위 기업은 어떤 결정을 했을까. 남아서 계속 자동차를 팔고 있다. 떠날 이유가 없었다. 러시아 자동차 시장을 장악하고 있는 건 토요타도, 메르세데스 벤츠도 아닌 러시아 기업이기 때문이다. 아브토바즈. 처음 들어보는 독자도 많을 듯하다. 글로벌 시장에서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아브토바즈의 인기 브랜드 라다는 성능이 별로다. 러시아인들이 공공연하게 역대 최고의 차로 꼽는 라다 니바는 1977년 출시 이후 45년 동안 한 번도 풀 체인지 모델을 내놓지 않았다. 이렇다 할 성능 개선이 없었단 얘기다. ‘구제틱’한 외형에 매력을 느끼는 소비자가 한국에도 있지만 라다 니바는 한국 배출가스 기준을 통과하지 못했다. 그래도 러시아에선 잘 팔렸다. 자국 기업 효과가 영향을 미쳤다. 어쩌면 아브토바즈 입장에선 우크라이나 사태를 기회라고 봤을지도 모르겠다. 경쟁사가 알아서 러시아를 떠나주면 자연스레 시장 점유율을 더 늘릴 수 있을 테니 말이다. 그런 아브토바즈가 최근 러시아에서 생산을 중단했다.
관련 외신을 찾다가 월스트리트저널(WSJ)의 제목이 눈길을 끌었다. ‘냉전시대 자급 경제의 상징이던 러시아 자동차 브랜드가 생산을 중단하다.’(Iconic Russian Car Maker, Known for Cold War Self-Reliance, Halts Production.) WSJ는 아브토바즈 공장이 멈추는 건 과거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고 했다. 아브토바즈의 역사를 살펴보면 이유를 알 수 있다.
1960년대 소련 경제가 성장 궤도에 들어서면서 국민은 승용차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정부는 자동차 산업을 육성하기로 했으나 기술력이 부족했다. 이탈리아 자동차 업체 피아트와 손을 잡고 자동차 회사(아브토바즈 전신)를 세웠다. 조립뿐 아니라 차량에 들어가는 모든 부품을 자체 생산했다. 그때는 그게 가능했다. 이후 소련은 자동차를 팔아 외화를 벌기로 작정했다. 1973년 신규 브랜드 라다를 만들었다. 라다는 러시아어로 돛단배를 뜻한다. 1991년 소련이 붕괴하고 아브토바즈로 사명을 변경한 뒤에도 라다는 잘 나갔다. 2007년 민영화됐고 2009년 최대 주주가 프랑스 르노로 바뀌었지만 러시아 국민은 여전히 아브토바즈를 자국 기업으로 여긴다.
사정이 달라졌다. 지금은 부품의 20% 이상을 외부 조달한다. 서방의 경제 제재로 공급망이 막히면서 부품 조달에 차질이 생겼다. 공장은 멈출 수밖에 없었다. 당초 러시아는 서방이 경제 제재를 하겠다고 했을 때 할 테면 해보라는 식이었다. 러시아는 외환을 넉넉히 쌓고 서방 의존도를 줄이는 ‘경제 요새화’ 작업을 진행했었는데 그걸 믿었던 거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요새는 없었다. 브루킹스연구소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사태 이후 러시아에서 활동하던 400개 이상의 기업이 사업을 철수하거나 문을 닫았다. 국민은 상상을 초월하는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독일 국제안보문제연구소 러시아 경제 전문가 야니스 클루게는 “러시아와 같은 소규모 경제는 복잡한 첨단 기술 제품을 자체적으로 생산할 수 없어서 (자급자족이라는) 러시아의 야망은 처음부터 비현실적이었다. 러시아 경제는 이제 훨씬 원시적일 것”이라고 말했다.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러시아뿐 아니라 세계 어느 나라나 마찬가지다. 푸틴 대통령에게 최재천 이화여대 석좌교수가 쓴 ‘숲에서 경영을 가꾸다’의 일독을 권한다. 책엔 이런 내용이 적혀 있다. ‘언뜻 보기에 자연은 한정된 자연을 두고 오로지 경쟁만 존재하는 것 같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손잡지 않고 살아남은 생명은 없다. 자연의 모든 생물 중 짝이 없는 생물은 없다. 말하자면 손을 잡은 자들이 미처 손잡지 못한 자들을 물리치고 사는 게 세상이다.’
이용상 산업부 기자 sotong203@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