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을 빼닮은 여인

입력 2022-03-29 20:22
주승중 목사가 섬기고 있는 인천 주안장로교회 주일 예배 모습.

나의 어머니 이정남 권사는 1930년 6월 25일에 부산에서 태어나셨다. 원래 나의 외조부모님들은 대대로 불교를 믿는 분들이었는데 나중에는 모두 기독교에 귀의하여 말년에는 교회에 출석하셨다. 이는 한국 교회의 대표적인 순교자 주기철 목사님의 집안에 당신들의 맏딸을 시집보낸 당연한 결과였다.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신 외조모님의 영향으로 나의 어머님은 어려서 교회에서 운영하던 유치원에 보내졌다. 절에 다니시던 외할머님이 어머니를 교육하기 위하여 교회에 보낸 것이다. 이렇게 해서 어머님은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셨지만,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와 접하게 되었고, 주일에는 주일학교를 다니면서 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불교 집안에서 태어나신 어머님께서 이렇게 어려서부터 자연스럽게 교회에 출석하게 되고, 신앙을 갖게 된 것은 순교자 집안의 며느리가 되게 하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진행된 준비 과정이었던 것이다.

섭리 가운데 남편과의 만남

어려서부터 어머님은 외조모님의 영향을 많이 받았는데, 외조모님은 선비 집안에서 태어나 총명하고 경우가 밝아 잘못과 불의를 보면 그것을 기어이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던 분이었다고 한다. 그런 외할머니의 성품을 그대로 이어받으신 어머니는 어려서부터 총기가 있었고, 그 당시 들어가기 힘든 간호전문학교를 들어가 그곳에서 간호사로서의 훈련을 받으셨고 태평양 전쟁이 한참 진행되던 말기에, 학교를 졸업하고 부산시립병원에서 간호사로 봉사하셨다.

주 목사의 부친 주영해 장로와 모친 이정남 권사.

그 병원에서 마침내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아버지와의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졌다. 어느 날 어머니께서 병원에서 일하고 있는데, 한 젊은 청년이 응급실에 실려 들어왔다. 그는 매우 초췌한 모습에 폐병이 심각한 상태로 진행되어 있었고,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있는 상태였다. 그 청년을 보는 순간 어머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보게 되었고, 최선을 다하여 간호해 주었다. 훗날 그 청년과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않은 채 말이다. 그 청년이 바로 나의 아버지이자, 당신의 남편이 된 故 주영해 장로였다. 나의 아버지 주영해 장로는 순교자 주기철 목사의 4남 중 3남으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말로 다할 수 없는 고난 가운데 보낸 분이셨다. 순교자의 자식으로 태어나 일제 강점기에 어린 시절을 보내면서 신사참배를 반대하는 목사의 자식이라 하여 초등학교를 7번이나 퇴학당하는 등 온갖 고생을 하였다.

주승중 목사의 할아버지 주기철 목사.

이런 어려운 상황에서 청소년 시절을 보낸 주영해 장로는 당신의 아버지인 주기철 목사께서 1944년 4월에 순교하신 후, 일제의 감시와 핍박을 피하여 부산으로 홀로 내려가셨다. 그의 부산에서의 생활은 계속되는 고난의 삶이었다. 제대로 교육도 받지 못하였고, 그렇다고 아는 이도 없는 그 곳에서의 생활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이었다. 그는 밤에는 사랑의 원자탄 손양원 목사님이 운영하는 애린원에서 잠을 자면서 고아들을 돌보고, 낮에는 부산의 한 통나무 공장에서 일을 하면서 겨우 겨우 지낼 수 있었다. 그런 와중에 그는 영양실조에 걸리고, 무리를 하여 폐병에 걸리게 되었다. 마침내 노숙자처럼 길거리에 쓰러지게 되었는데, 마침 누군가가 그를 발견하여 부산시립병원에 업어다 주는 바람에 살게 되었다. 바로 그곳에서 나의 어머니 이정남 권사를 만나게 된 것이다.

생각해 보면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이 아닐 수 없다. 만일 그 때 누군가가 길거리에 쓰러져 있는 아버지를 업어다 병원으로 데려다 주지 않았던들, 그리고 만일 어머니께서 그 때 그 병원의 간호사로 일하고 있지 않았던들, 오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방 여인에 찾아온 환상의 사건

앞서 소개하였지만, 어머니는 불교집안에서 태어난 여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의 은혜로 집안 식구들 가운데 유일하게 어려서부터 교회를 출석하게 되었고, 마침내 하나님의 약속의 언약이 있는 집안에 며느리로 들어오게 된 것이다. 그녀를 통해서 그의 부모님을 비롯한 내 외가 쪽의 가족들 거의가 구원받게 되었고, 또한 믿음의 대가 이어지게 되었으니 이 얼마나 귀하고 소중한 하나님의 은혜인가!

주 목사가 100일쯤 됐을 때의 어머니.

하나님께서 이렇게 어머님을 불신자의 가정에서 순교자의 가정으로 시집을 오게 한 데는 분명한 하나님의 섭리와 뜻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그 섭리를 이루기 위하여 나의 어머님을 매우 특별하고 신비스러운 경험을 통해서 부르셨다. 이것은 아마도 그녀가 뿌리 깊은 불교 집안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언젠가 어머니께서 당신이 하나님으로부터 확실하게 부름 받은 한 신비스러운 사건이 있었다고 말씀하신 적이 있다. 어릴 때부터 교회는 다니고 있었지만 신앙이 확고하지 않았던 어머니에게, 어느 날 환상 가운데 가시 면류관을 쓰신 주님께서 피를 흘리시며 나타나셔서 “너의 죄를 위하여 이렇게 피를 흘린 나를 네가 박대할 것이냐?”라고 물으셨다는 것이다. 그 순간 어머니께서는 너무나 두렵고 죄스러워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고 주님을 철저하게 따르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왜 어머니에게 이런 특별한 환상을 보게 하시고 그 가운데서 그녀를 부르신 것일까? 이것은 분명 당신의 시아버지가 되실 주기철 목사의 며느리로서 순교신앙을 가져야 할 것을 말씀하신 사건이라 믿어진다. 그리고 앞으로 그녀를 통해서 그 후손들 가운데 신실한 주님의 종들이 많이 나오게 하실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의 사건이라 여겨진다. 생각할수록 감동적인 것은 주기철 목사님의 후손들 가운데 목회자들의 열매가 모두 그녀의 자손들 가운데 나오게 된 것이고, 이것은 참으로 놀라운 하나님의 섭리가 아닐 수 없다. 주기철 목사의 3남인 주영해 장로와 이정남 권사 사이에 나온 후손들 가운데 필자를 포함하여 목사가 8명이나 배출되어 신앙의 대가 연결되었으니 말이다.

장신대신대원 졸업 때 부모와 함께한 주 목사.

이방신을 섬기던 모압 출신의 룻이 나오미의 며느리가 되어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라”고 고백하면서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들어와 결국에는 이스라엘의 성군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듯이, 나의 어머니는 하나님을 모른 채 이방신을 섬기던 집안에서 태어났으나 그 환상의 사건을 통해서 확실한 체험적 신앙을 가지고 믿음의 가정에 시집을 와 많은 믿음의 자녀들과 주의 종들의 어머니와 할머니가 된 것이다.

찬양의 어머니… 내 삶을 지탱

나의 어머니는 찬양과 기도의 어머니이셨다. 그녀는 찬양을 참 잘하셨다. 그래서 때로 교회에서 아버님께서 반주를 하시고 어머님이 특송을 하기도 하셨다. 사실 찬양은 아버님도 둘째가라면 서러워하실 정도였다. 그래서 필자는 어려서부터 가정예배를 드리는 가운데 부모님들의 찬양을 들으면서 자랄 수 있었고, 그 분들로부터 이어받은 찬양의 유산이 내 심령 깊은 곳에 있다. 또한 나의 어머니는 자녀들을 신앙으로, 기도로, 그리고 교회를 섬기며 헌신하는 믿음으로 우리를 가르치셨고, 우리가 순교자의 후손으로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도록 양육하셨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주승중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

◇주승중 목사=나겸일 목사가 원로목사로 있는 인천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이며, 한국기독교 성자요 순교자로 잘 알려진 故 주기철 목사의 손자이다. 주기철 목사는 일제강점기 신사참배를 거부하고 반대운동을 하다 10년형을 선고받아 복역하던 중 순교했다. 주기철 목사는 6·25전쟁 때 희생된 손양원 목사와 함께 한국 개신교의 대표적 순교자이자 정신적 스승으로 꼽힌다. 주승중 목사는 숭실대학교 영어영문학과(B.A.) 졸업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M.Div.)과 동 대학원(Th.M.)을 거쳐 미국 콜럼비아 신학교(Th.M.)와 보스톤 대학교 대학원(Th.D.)에서 유학한 후 장로회신학대학교 교수로 재직 중 2012년 9월 주안장로교회 담임목사로 청빙받아 현재까지 아름답게 목회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