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이블시론] 누가 이 형편없음에서 구할까

입력 2022-03-25 04:02

스스로 성경을 골몰해서 읽기 시작한 대학시절 이후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성경의 위인들은 하나 같이 서럽고 외롭고 불운하고 고통을 수반한 인생을 살았다는 것이다. 그들의 삶은 위태하고 위험했다.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고, 누구도 그들의 아픔을 치료 치유해 주지 않았다. 뻔히 보이는 곤란도, 환란도 피하지 않고 굳이 또 굳이 죽음의 길을 선택하더라는 것이다. 그나마 자연수를 누린 이들조차 그와 흡사했다. 인생의 소명을 다할 즈음 기진맥진한 채 다리 힘은 풀리고 의식조차 가물가물하지만 마지막 남은 숨을 다해 다다른 결승선이 저만치 보일 때, 운동장의 관중석에서 소리 질러 환영하고 박수하며 응원해줄 그 허다한 무리를 난, 위인이 되신 영웅들이시라 증거한다.

시대의 어젠다가 협의 불가능한 무질서의 시대를 살고 있는 우리는 저마다 삶의 무게로 허덕인다. 출생 출신 학력 업종 재력 권력으로 이합집산돼 유유상종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좀 더 잘살아 보려고 무던히도 수고하고 수고한다. 어쩔 수 없이 이해득실의 호불호에 근거하여 진영의 구성원이 되거나 여론의 좌우에 잠시 혹은 무작정 속해 보지만 그 또한 구구절절 주장만 난무한다. 주장의 차이는 부지불식간, 사사건건 분쟁으로 발발해 사회 구성원의 모든 화제를 장악하고는, 제동이 걸리지 않는 분노로 변해서 분기탱천의 제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서로를 향해 무한 돌진의 전쟁을 불사한다. 생각의 충돌, 감정의 격돌로 점철된 전쟁 난국을 일상으로 살아간다. 난세다! 태고부터 태평성대는 요원해서 모든 시대 모든 사회는 영웅을 기다린다. 누가 우리를 이 형편없음에서 구제할까?

오래전, 마터호른이라는 산봉우리를 보면서 정리한 영웅에 대한 생각을 뒤적거린다. 스위스 체르마트에서 전기차로 등반하여 대면한 마터호른은 ‘영웅적’을 경험하게 해준 산봉우리다. 알프스로 통칭하는 산계는 우직하고 우람한 산세가 끝없이 이어지는데 그 산등성이에서 간헐적으로 유별나고 특별하게 돌출된 부분이 산봉우리이다. 마터호른은 그중, 가히 가장 아름답다는 산봉우리였다. 천지창조의 어느 한 부분 땅의 조산운동으로 지층의 판과 판이 충돌할 때 그 격돌의 순간 뿜어져 솟아오른 돌출부! 자연의 난세에 등장한 영웅적 돌덩이다. 시시각각 일조각의 변화에 그 아름다움은, 1도 같음 없는 예술이다. 그 조화는, 어마어마하게 신비해서 경험한 이에게는 평생의 기억이다.

넋을 놓고 마터호른에 빠져들다가 불현듯 주변이 눈에 들어오는데, 그 잘생긴 스타 마터호른의 덕을 보는 수많은 산봉우리가 눈에 띄었다. 저마다 이름을 갖고 있는 그들은 마터호른이 없었으면 존재조차 희미했을 터이다. 아! 자연도 스타가 필요했다. 그는 저만 홀로 잘남을 즐기지 않았다. 잘남을 지탱해준 동료 봉우리들의 영웅이었고 마터호른을 지지하는 멋진 공동체의 주인공이었다. 이어 살피니 마터호른의 특별함을 지키기 위해 사람들은 길을 내고 숙소를 만들고 마을을 청정하게 지켜냈다. 불편을 감수하고 마을 내에서는 도보, 자전거, 전기자동차 등만을 이동수단으로 활용했다. 그 결과 마터호른은 전 세계인들의 보물로 자리매김했다.

영육의 충돌, 속사람과 겉사람의 다툼을 체휼하셔서 우리의 무지와 연약함을 헤아리시고 우리에게 진짜 영웅, 참 주인공이 필요하심을 알고 계신 분이 예수시다. 또한 그날, 그 운동장에서 환영해 주실 허다한 무리, 예수의 제자들이시고 성경의 위인들이시다. 나는 오늘이라는 매일을 그분을 감동하고, 지키고, 확장하는 일에 골몰하고 고민하는 하루에 충성한다. 체르마트의 주민처럼.

정애주 홍성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