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방송 뉴스를 챙겨보는 편이다. 그중에서도 종합뉴스를 선호하는데 저녁 식사 시간과 맞물려서 ‘뉴스와 밥’은 한 묶음처럼 돼버렸다. 그런데 어느 날 뉴스를 보다가 문득 밥 먹는 내 모습이 어딘가 불편하고 이상하게 느껴졌다. 전쟁, 노동자의 죽음, 아동 학대, 재난 상황 등이 보도될 때면 더 그랬다. 삶을 송두리째 빼앗겨버린 이들의 통곡 소리를 들으면서, 전쟁으로 죽은 아이가 들것에 실려 가는 것을 보면서 차마 숟가락을 들 수 없었다.
이런 일이 빈번해지자 뉴스와 밥을 분리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쉽지 않았다. 함께 사는 이도 밥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는 습관이 있었기 때문이다. 생각해보면 식당에 가더라도 뉴스는 늘 틀어져 있었으니 밥을 먹으면서 뉴스를 보는 일은 한국에서 익숙한 풍경이기도 했다. 식사라는 일상적 행위에 배치된 뉴스는 어떤 식으로든 재난이나 전쟁의 참사를 다른 감각으로 흘려보내거나 무뎌지게 한다. 그렇지 않으면 고통스러워하는 이들을 앞에 두고 태연하게 밥 먹는 일이 힘들어지기 때문이다.
미국 평론가 수전 손택은 ‘타인의 고통’에서 전쟁이나 타인의 고통을 담은 이미지가 뉴스를 통해 충격적이고 자극적으로 전해질 때 사람들은 그것을 구경꾼이자 관찰자의 입장에서 소비하게 된다고 논한 바 있다. 고통을 작정하고 소비하는 사람이 없을지라도, 우리의 일상은 뉴스를 보면서 밥을 먹는 행위처럼 의외의 지점에서 서로 연결돼 있다. 이것을 인식한 후로 나에게 뉴스와 밥은 ‘타인의 고통을 어떻게 마주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됐다. 일시적으로 외면할 수는 있어도 다시 무감각하던 때로 돌아가기 어려워진 것이다. 우리는 매일 뉴스를 통해 재난 상황에 놓인 이들을 마주할 것이다. 시청자로서, 동시대를 살아가는 사람으로서, 무엇을 하며 뉴스를 보고 있는가. 평화와 안녕을 기원하는 일이 일상에서 사랑을 말하는 것만큼이나 조심스럽고 어려운 요즘이다.
천주희 문화연구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