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미 장애운동 대모의 '휴먼 선언'

입력 2022-03-24 18:46
1970년대 재활법 504조 서명 운동 당시의 주디스 휴먼. 휴먼의 장애 운동에서 504조 서명 운동은 하이라이트에 해당한다. 휴먼은 정부의 서명을 받아내기 위해 동료 장애 운동가들과 함께 뉴욕 한복판에서 차선 점거 시위를 벌였고, 연방 건물을 24일간 점거하기도 했다. 사계절 제공

미국의 장애 운동가 주디스 휴먼의 자서전이다. ‘나는, 휴먼’이라는 제목은 이 책이 휴먼(Judith Heumann) 개인의 이야기이자 장애인들의 휴먼(human) 선언임을 절묘하게 표현한다. 휴먼은 생후 18개월에 겪은 소아마비로 휠체어를 타게 된 장애인이자 미국 장애인 인권 운동의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휴먼과 동료들의 장애 운동은 넷플릭스 다큐멘터리 ‘크립 캠프’(2020년)로 제작됐다.


장애인에서 활동가로

1947년 뉴욕 브루클린에서 유대인 이민자 부부의 딸로 태어난 휴먼은 장애아를 시설에 보내라는 당시의 압력을 거부한 부모 덕에 일반 학교에 다녔고 대학에도 진학했다. 졸업 후 그는 장애를 이유로 교사 면허를 불허한 뉴욕시 교육위원회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해 이겼다. 얼마 후 뉴욕주는 시각장애인이나 지체장애인이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을 막지 못하게 하는 법안을 통과시켰다.

여기까지는 휴먼이 개인으로서 싸운 얘기다. “온 세상은 내가 아픈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내가 세상의 한 부분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번번이 자신을 막아서는 배제와 차별, 무시 앞에서 ‘싸울 것인가, 참을 것인가’ 스스로에게 물어야 했고, 그때마다 싸우는 길을 택했다. “만약 내가 싸우지 않는다면, 누가 이 싸움을 할까.”

이런 경험은 그를 장애 운동에 투신하도록 이끌었다. 64년 제정된 미국 시민권법에는 인종, 피부색, 종교, 출신 국가에 따른 차별을 없애기 위한 조항은 있었지만 장애에 대한 조항은 없었다. 장애인을 시민의 범주에 넣지 않은 것이다.

미국의 장애인 시민권 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두 가지 승리는 연방 정부의 재정 지원을 받는 기관 및 프로그램이 장애인을 차별하는 것을 금지하는 재활법 504조 서명과 미국장애인법 서명이다. 휴먼은 재활법 504조 서명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72년 닉슨 대통령의 재활법 개정안 서명 거부에 항의하며 맨해튼 매디슨 애비뉴의 차선을 점거하는 시위를 벌였다. 77년에는 재활법 504조 시행 규정에 서명하지 않는 보건교육복지부 장관을 압박하기 위해 샌프란시스코 연방 정부 건물을 24일간 점거한 끝에 서명을 끌어냈다.

휴먼은 이 책에서 재활법 504조 서명 운동 과정을 상세하게 보여준다. 그것은 “장애인들이 한 최초의 전투적인 행동”이었고 장애인의 존재와 목소리를 사회에 드러낸 사건이었다. 휴먼은 “갇힌 채로, 보이지 않는 상태로 사는 한 누구도 우리의 진정한 힘을 볼 수 없고 우리의 목소리는 묵살당할 것”이라고 동료들을 독려했다. 점거 시위를 취재하는 기자들에겐 이렇게 요구했다.

“불구자(crippled) 핸디캡(handicapped) 벙어리(mute) 멍청이(dumb) 같은 단어를 사용하지 말아 주십시오. 이런 구식 용어는 오늘날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가운데 어떤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장애가 있는 사람들입니다.”

휴먼은 80년 세계장애인기구 설립에 참여했으며 미국 장애인법 제정 운동을 열정적으로 지원했다. 90년 7월 26일 마침내 조지 HW 부시 대통령이 미국장애인법에 서명했다. 휴먼은 “공화당과 민주당 소속의 대통령 다섯 명을 거치며 거의 20년 가까이 투쟁한 끝에 우리는 내가 아는 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 가장 포괄적인 시민권법을 만들었다”며 “나는 마흔한 살에 마침내 동등한 시민이 됐다”고 썼다.

이후 휴먼은 미국과 세계의 장애 운동 리더가 되었다. 빌 클린턴 행정부에서 특수교육 및 재활 서비스국 차관보, 버락 오바마 행정부에서 국제 장애인 인권에 관한 특별 보좌관으로 일했다. 세계은행 최초의 장애와 개발 자문위원을 지냈다. 그는 “장애는 인간사의 자연스러운 한 부분”이라며 “장애를 중심으로 사회를 설계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전 시기라면 아마 죽었을 사람들이 점점 더 오래 살게 될 것이다. 아마도 장애를 가진 채. 우리는 이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이를 위한 준비를 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오래 기다렸다”

휴먼은 이 책에서 장애인 인권이라는 개념조차 없던 시기를 통과해온 개인사를 잔잔하게, 다소 서글픈 목소리로 회고한다. 미국 장애인 운동사를 아우르면서도 책의 어조는 휴먼의 개인적인 목소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그는 전설이 된 샌프란시스코 연방 건물 점거 사건도 과장하지 않는다. 그는 줄곧 싸우는 것에 대해, 변화에 대해 얘기한다.

“변화는 결코 우리가 생각한 속도에 맞춰 찾아오지 않는다. 수년에 걸쳐 많은 사람이 함께 참여하고, 전략을 세우고, 공유하고,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야만 온다. 점진적으로 고통스러울 만큼 천천히 변화는 시작된다. 그러다 갑자기 아무런 예고도 없이 무언가가 살짝 기울어질 것이다.”

휴먼의 자서전은 새로운 장애 서사를 보여준다. 장애를 인간의 정체성으로, 장애인을 싸우는 존재로 보여준다. 교육받을 권리, 대중교통을 이용할 권리, 활동 보조인을 지원받을 권리 등을 위해 싸우는 장애인의 투쟁은 흑인들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과 본질적으로 같다. 그들이 원하는 건 치료가 아니라 평등이다.

책을 읽다 보면 자연스레 한국의 장애인과 장애 운동을 생각해보게 된다. 한국의 장애 운동가들도 끈질기게 싸워왔고 지금도 싸우고 있다. 장애인 권리 실현을 위한 예산 확보를 목표로 시작된 출근길 지하철 시위는 3개월째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장애인의 시위를 보는 시민들의 눈은 그리 우호적이지 않다.

휴먼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권리를 요구하는데도 ‘불만이 많다’ ‘이기적이다’라는 틀에 갇히고 만다”며 “우리에게 ‘끝없이 요구하는’ ‘끈질긴’이라는 이름표를 붙이는 것은 우리를 굴복하게 하려는 또 다른 방식일 뿐”이라고 말했다.

휴먼과 동료들은 차도를 막았고 정부 건물을 점거했고 단식을 했고 입구를 휠체어로 들이박았다. 그들은 휠체어를 밀고 매디슨 애비뉴 한가운데로 돌진해 네 개 차선을 모두 막았다. 보건교육복지부 건물 앞에서 경비원에게 가로막히자 그들은 휠체어를 돌려 후진했다. 그런 다음 곧장 휠체어를 건물 쪽으로 몰았다. “부딪치고 부딪치고 또 부딪쳤다. 쾅 소리가 나도록 문을 들이받았다.”

휴먼이 독자들에게 들려주는 가장 중요한 이야기는 장애인들이 너무 오래 참아왔다는 것인지 모른다. “너무 오래 기다렸고 너무 많은 타협을 했고 너무 많은 시간을 인내해왔습니다.… 더 이상의 차별을 용납하지 않겠습니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