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은 전례 없는 비극을 만들어냈다. 러시아 폭격에 우크라이나 주요 도시는 잿빛이 됐고, 자랑하던 밀밭은 검문소와 참호로 뒤덮였다. 무엇보다 일상이 사라졌다. 사람들은 알람 소리 대신 공습경보에 잠에서 깼다. 나이프와 포크로 먹는 법도 잊었다.
러시아군 폭격으로 무너진 동남부 마리우폴 극장 건물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온 생존자들은 22일(현지시간) BBC에 “끔찍한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고 했다. 한 남성은 “‘죽기 싫다’고 말하는 5살 아이의 목소리가 아직도 생생하다”고 전했다.
어린이와 여성 등 민간인 수백명이 대피소로 사용했던 이 극장은 지난 16일 러시아군이 투하한 폭탄에 폐허가 됐다. 건물 앞뒤 공터에 러시아어로 ‘어린이’라는 글자를 크게 써놨지만 러시아군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곳을 폭격했다.
마리아 로디오노바는 마리우폴을 향한 러시아군의 공세가 이어지자 평소 살던 아파트를 떠나 이곳 극장에서 생활해왔다. 따뜻한 물을 얻기 위해 사람들이 줄 서 있던 극장 건물 입구로 향하던 순간 폭탄이 건물 위로 떨어졌다고 했다.
이어 극장 곳곳에서 사람들의 비명이 들리기 시작했다. 유리 파편이 얼굴을 뒤덮은 남성, 머리에 상처를 입은 여성 등의 모습이 로디오노바 눈에 보였다. 잔해에 깔린 아이들을 찾아 울부짖는 이도 있었다. 그녀 역시 귀에 심한 통증을 느꼈다.
끔찍한 참사 현장에서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진 로디오노바는 이후 며칠을 걸어서 마리우폴을 빠져나왔지만 그곳에 남겨진 할머니의 생사는 지금까지 확인하지 못했다.
승자 없는 전쟁에 민간인의 피해만 점점 커지고 있다. 유엔 인권사무소에 따르면 지난달 24일 개전 이후 한 달 동안 우크라이나에서 목숨을 잃은 민간인은 어린이 75명을 포함해 925명이나 됐다. 민간인 부상자도 어린이 99명을 포함해 1496명으로 집계됐다. 하지만 실제로는 이보다 훨씬 많은 민간인이 목숨을 잃은 것으로 보인다.
전쟁을 피해 피란을 떠난 사람 수도 1000만명에 달한다. 우크라이나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피란민이 된 것이다. 국외로 피란을 떠난 사람이 약 349만명, 로디오노바처럼 국내 난민이 된 사람은 약 648만명으로 나타났다.
유엔난민기구는 지난 수십년을 통틀어 가장 빠른 속도로 증가한 피란 행렬이라고 전했다. 이어 국경을 넘은 난민 가운데 90% 정도가 여성과 어린이라고도 덧붙였다. 필리포 그란디 유엔난민기구 대표는 “약 4주 동안 세계는 믿을 수 없는 광경을 지켜봤다”며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잃었고 수백만명의 삶이 완전히 뒤집혔다”고 말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이들 중 많은 수가 정신 건강에 문제를 겪고 있다고 전했다. 인접 국가 중 가장 많은 난민(약 211만3500명)을 수용한 폴란드의 WHO 사무소는 “약 50만명의 난민이 정신 건강을 위한 지원이 필요하다”며 “특히 이 중 3만명은 심각한 정신 건강 문제를 겪고 있다”고 밝혔다.
황인호 기자 inhovat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