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11월 대한민국은 국가 부도에 빠졌습니다. IMF 금융위기입니다. 중앙정부는 인원 감축을 시작했습니다. 국방부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당시 강원도 인제에서 군종장교로 근무하던 저는 국방부에서 걸려온 전화를 받았습니다. 1999년 8월 31일 전역했습니다. 공병여단 교회에서 서대문교회로 임지를 옮기고 박사 과정 공부에 몰두했습니다.
고려대 사회학과 박사 과정을 마친 뒤 영국 노팅엄트렌트대 문화학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여가사회학자 크리스 로젝과 문화이론가 마이크 페더스톤에게 문화와 여가의 세계화에 대해 배웠습니다. 스코트 래쉬, 존 어리, 울리히 벡 등 책으로만 읽었던 대가들에게 직접 특강을 듣고 대화했습니다. 놀라운 신세계였습니다.
저의 인생 책, 노르베르트 엘리아스의 ‘문명화과정’은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게 예술은 모방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시학’은 모방의 즐거움에 관한 책입니다. 인간은 모방합니다. 모방하면서 배웁니다. 모방을 통해 만든 진지한 연극, 정극에서 즐거움을 느낍니다. 정극을 보면서 전개되는 사건들 간에 관계가 명확해지면서 즐거움을 느끼고 감정이 정화됩니다. 연극은 사건을 재현합니다. 연극을 보는 우리는 연민과 공포를 느끼면서 재미있어합니다. 결국 공부와 재미는 카타르시스로 이어집니다. 이것이 바로 여가입니다. 그래서 그리스어에서 여가를 뜻하는 ‘스콜레’는 영어에서 학교(school)가 됩니다.
이런 여가관은 2000년 동안 서유럽 사회를 지배했습니다. 변화는 엘리아스로부터 시작됩니다. ‘문명화과정’이 바로 그 책입니다. 엘리아스는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을 문명화과정(civilizing process)의 역사로 보았습니다. 중세 유럽인들은 단기적 이득을 추구하는, 감정적이고 폭력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근대 유럽인은 장기적인 이득을 얻기 위해 전략적으로 행동합니다. 그 과정에서 유럽인들은 감정을 억제하고 폭력 사용을 자제하는 능력을 획득합니다.
사회는 점점 더 안전해집니다. 문제는 재미가 없다는 것입니다. 안전하지만 재미없는 근대 사회를 살아가는 근대인을 위한 제도화된 재미, 즉 근대적 대중 여가를 만들어갑니다. 수많은 사람이 죽어 나자빠지는 영화, 불륜이 판을 치는 소설, 뺨을 예사로 후려치는 막장 드라마 등. 우리는 이것을 여가라 부릅니다. 근대인은 여가를 통해 억눌렀던 감정과 자제했던 폭력 욕구를 발산합니다. 마치 카타르시스처럼 심리적인 대항균형(counter-balancing)을 이룹니다. 그리고 일터로 복귀합니다.
유럽 교회는 근대적 대중 여가에 맞서 합리적 레크리에이션 운동을 벌입니다. 그러나 교회는 여가에 대해 잘 몰랐습니다. 시민들은 반대합니다. 근대 사회는 세속화됩니다. 교회는 텅텅 비기 시작합니다. 여가 실패는 교회 실패로 이어졌습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한국교회는 모여서 예배드릴 수 없었습니다. 집단면역 단계에 접어들었습니다. 다시 모일 날을 준비합니다. 과연 성도들은 교회로 돌아올까요.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엘리아스는 ‘문명화과정Ⅱ’에서 그 해답의 단서를 던져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