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감리교 선교사 윌리엄 스크랜턴(1856~1922)은 초기 한국선교를 대표하는 선교사 중 한 명이다. 하지만 그의 말년은 쓸쓸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85년 조선에 입국해 주님의 사랑을 실천했던 그는 동료 선교사들과 갈등을 빚다가 1916년 중국의 항구도시 다롄으로 떠났으며 이듬해엔 일본 고베로 거처를 옮겼다. 스크랜턴은 이곳에서 1921년 교통사고를 당한 뒤 투병하다가 이듬해 3월 23일 세상을 떠났다. 생전에 그는 이런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죽음이란 마치 이쪽 방에서 저쪽 방으로 문을 통해 가는 것과 같다.”
스크랜턴 서거 딱 100년이 되는 날인 23일, 서울 중구 상동교회(이성조 목사)에서는 그의 거룩했던 삶을 되새기는 추모제가 열렸다. 행사에서 시인이기도 한 최문자 전 협성대 총장이 추모시를 낭독했으며, 상동교회 호산나 남성중창단은 추모 공연을 선보였다. 설교자로 나선 이는 이철 기독교대한감리회(기감) 감독회장이었다. 그는 ‘은혜를 전하는 통로’라는 제목의 설교를 통해 스크랜턴의 업적을 기렸다. 이 감독회장은 “선교사들은 우리가 희망이 없을 때 희망을 주고, 억압을 받을 때 다시 일어나게 만든 사람들”이라며 “스크랜턴 선교사 역시 우리에게 복음을 전달해준 중요한 은혜의 통로였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의 감리교회는 스크랜턴의 희생을 잊지 말았어야 했지만 오랜 기간 그의 삶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했었다”며 “스크랜턴의 희생을 귀중히 여겨야 한다”고 거듭 강조했다.
이 감독회장은 “스크랜턴이 뿌린 씨는 소멸되지 않고 지금도 자라고 있다”면서 “우리는 한국의 감리교회가 스크랜턴 같은 선교사가 만든 터 위에 세워졌음을 후대에 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감독회장의 말마따나 스크랜턴은 한국교회에 거대한 유산을 남겼다. 예일대와 뉴욕의대를 졸업한 그는 창창한 미래가 보장된 청년이었다. 하지만 주님의 부르심에 따라 스물아홉 살 되던 해에 어머니 메리 스크랜턴(1832~1909)과 함께 조선에 들어와 민중 선교에 매진했으며 서울에 아현감리교회 상동교회 동대문교회를 설립했다.
기감은 이런 업적을 남긴 스크랜턴의 뜻을 되새기기 위해 다채로운 행사를 준비하고 있다. 오는 27일엔 상동교회에서 ‘스크랜턴 서거 100주기 영성집회’를 개최하고 다음 달 30일에는 아현교회(김형래 목사)에서 심포지엄을 연다. 영성집회에서 설교자로 나서는 이는 유기성 선한목자교회 담임목사다. 유 목사는 기감 서울연회 홈페이지 등에 게시된 영성집회 초청 영상에서 이렇게 말했다.
“도대체 스크랜턴 선교사를 한국에 오게 하신 주님의 역사는 무엇이었을까요. 삶의 마지막이 힘들고 고통스러웠음에도 어떻게 그는 끝까지 주님의 종이 될 수 있었던 걸까요. 집회를 통해 그 영적인 비밀을 찾아봤으면 합니다. 왜냐면 우리에게는 그 비밀이 너무나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