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지현의 티 테이블] 순간에서 영원으로 살아가기

입력 2022-03-26 04:02

누구나 아련해지는 시간의 기억들이 있다. 수건을 몸에 두른 채 펭귄처럼 걷는 두 돌이 지난 딸 아이의 옛날 사진을 보면 떠오르는 기억처럼 말이다. 옛 사진을 보면 한때 젊었고, 하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나를 상상하기 때문에 행복해진다. 이런 것이 나뿐이겠는가. 누구나 영원하길 바라는 순간이 있을 것이다. 딱 한 번이라도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 그때의 시간으로 돌아가고 싶은 순간 말이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난 이어령 교수가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2015)에서 자신에게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 주신다면 서재 문을 열고 들어오는 어린 딸에게 두 팔을 활짝 펴고 굿나잇 키스를 하겠다고 말했던 것이 기억난다. 딸(이민아 목사)의 3주기를 맞아 쓴 책이었고, 이제 그 역시 이 땅에 존재하지 않는다. 하루 20초의 시간만이라도 매일 저녁 굿나잇 키스를 하듯 누군가의 영혼을 바라볼 수 있다면 많은 시간이 흐른 후에 삶의 아쉬움은 덜할 것 같다. 지금 이 순간도 과거가 되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이 영원했으면 좋겠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소원을 이룰 수 없을까. 그것은 우리가 행복을 누릴 줄 알 때 가능해진다.

최근 행복에 도전한 두 사람이 있다. 여든한 살, 여든다섯의 노배우이다. 연예인들을 모아 합창단을 만드는 JTBC의 예능 프로그램 ‘뜨거운 씽어즈’ 첫 방송에서 나문희, 김영옥의 무대가 많은 사람에게 회자됐다. 특히 프로그램 시작 전에 40만명이 유튜브로 시청한 나문희의 영상을 몇 번이고 다시 봤다. “쓸쓸하던 그 골목을 당신은 기억하십니까. 지금도 난 기억합니다.” 조덕배의 노래 ‘나의 옛날이야기’를 담백하게 부르는 그의 첫 소절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 무대를 바라보고 있는 화면 속 합창단 멤버 모두가 눈물을 훔쳤다. 이상한 일이었다. ‘천 개의 바람이 되어’를 부른 김영옥의 무대 역시 마찬가지였다. 여든다섯의 배우가 ‘나는 죽는 게 아니라 바람이 되어 당신 곁을 지킬 것이니 슬퍼하지 말라’는 가사의 노래를 불렀기 때문일까. 그는 살아가면서 이별해야 했던 가족을 생각하며 불렀다고 했다.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자기소개 삼아 들려준 노래는 대단한 기교나 힘이 있는 가창력의 무대가 아니었다. 왜 사람들은 ‘나도 모르겠는 눈물’을 흘리게 된 걸까. 인생에 투영된 울림일 것이다. 나의 어머니, 나의 할머니, 또 미래의 나의 모습을 돌아보게 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반가운 것은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선 배우들의 모습이었다. “할머니들도 집구석에만 있지 말고 좀 나와서 노래도 하고, 우리 세상이 있다는 걸 알았으면 좋겠어요.” “떨리지만, 재미로 삼아 행복하게 노래 불러 볼게요.” “행복해지려고 나왔어요”라고 말하는 이들의 삶의 태도를 배우고 싶다.

행복한 순간을 느낄 수 있는 것은 능력이다. 앙드레 지드는 ‘지상의 양식’에서 말했다. “풀벌레 하나, 꽃 한 송이, 저녁노을, 사소한 기쁨과 성취에도 놀라워하는 사람이 진정한 부자다. 감동할 때 우리는 정화되고 행복해지고 신성해진다. 그리고 감동해야 감동을 줄 수 있다. 타인의 마음에 불을 전하려면 먼저 자기 마음이 불타야 한다. 가장 가난한 사람은 내면의 불이 꺼진 사람이다. 오늘 놀라운 일은 무엇이었는가? 감동하거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 일은 무엇이었는가? 영감을 받은 일은 무엇이었는가? ”

나이 듦을 어떻게 받아들이냐에 따라 행복의 정도가 정해지는 것 같다. 사람들이 나이 드는 것을 두려워하는 이유 중 하나는 죽음이 두려워서다. 결국, 나이 듦은 일종의 자기모순에 빠진다. 모든 사람은 더 오래 살기를 바라지만 아무도 나이 드는 것은 원치 않는다는 것. 유대인 작가 아브라함 헤셸은 “나이 듦은 패배가 아니라 성공이며, 형벌이 아니라 특권이다. 마치 대학에서 최고 학년이 되는 것처럼 인생의 완성을 이룬다는 기대를 품고 노년을 맞이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기독교 신앙이 노년을 비극적 결말보다 새로운 모험과 축복으로 여길 수 있도록 도와주었으면 좋겠다. 그러기 위해선 나이 듦의 과정을 하나의 영적 훈련으로, 영적 여정으로 만들어야 한다. 영성의 본질은 하나님께서 무한한 시공을 가로질러 우리의 문을 두드리는 것이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를 듣고 문을 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 영성 훈련이다. 따라서 나이가 든다는 것은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찾길 바라시는 하나님께 응답하는 여정이다.


이지현 종교부 선임기자 겸 논설위원 jeehl@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