헌책방이 많이 사라졌다고는 하지만 내가 아는 곳만 해도 30∼40년 이상 헌책과 함께 생활한 사장님들이 운영하는 가게가 여럿이다. 이런 책방은 언뜻 누추해 보일지 몰라도 책과 함께한 세월의 더께만 한 주인장의 능력치는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초막에 기거하며 수수하게 생활하는 무림의 은둔 고수 같다고 할까?
하지만 이제 고작 십수년 내 가게를 운영한 처지에선 여전히 손님을 대할 때 실수가 잦다. 한번은 손님이 와서 “귀여운 미소 책 있어요?”라고 물었다. 나는 ‘귀여운 미소’라는 제목의 책을 찾는다는 소리로 알아들었다. 내 기억에 그런 책은 없다. 혹시 손님이 프랑수아즈 사강의 ‘어떤 미소’와 제목을 헛갈린 게 아닐까 싶어서 사강 책을 꺼내 보여줬더니 아니란다.
놀랍게도 손님은 책 제목이 아니라 작가 이름이 ‘귀여운 미소’라는 거다. 설마, 그럴 리가? 아무리 필명이라 해도 설마? 요즘 한창 인기 있다는 웹 소설이나 라이트 노벨 작가인가? 결론은 내가 손님 말을 잘못 들은 것이었다. 손님은 ‘귀여운 미소’가 아니라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를 찾던 거였다. 순간 나는 너무 부끄러워 멋쩍은 미소만 짓고 말았다. 손님에겐 절대로 귀여운 미소로 보이지 않았을 테지만.
정말로 손님이 책 제목을 착각한 일도 있다. 이 손님은 더없이 선한 표정으로 “혹시 ‘그리스도인 조르바’ 책 있나요?”라고 물었다. 손님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말해서 나는 그게 어디가 잘못된 것인지 금방 알아차리지 못했다. 알고 계신 책 제목이 그게 맞느냐며 되물었다. 손님은 정말 해맑게 웃으면서 말했다. “저희 목사님이 꼭 읽어보라고 설교 시간에 추천하신 책이거든요!”
이건 최대의 위기다! 그 책 제목은 분명 카잔차키스의 ‘그리스인 조르바’일 텐데. 목사님이 책 제목을 엉뚱하게 말했다고 그러자니 실례가 될 것 같고, 손님이 애초에 잘못 알고 있는 거라 지적하면 애써 가게를 찾아주신 손님을 무안하게 만드는 일이라 고민에 빠졌다.
결국 나는 매우 자연스럽게 손님에게 ‘그리스인 조르바’ 책을 주면서 “그리스도인 조르바 여기 있습니다”라고 했다. 나의 흔들리는 눈동자를 손님은 알아차리지 못한 게 분명하다. 손님은 책 제목도 제대로 확인하지 않고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싱글벙글 웃으며 돌아갔다. 이후 다시 책방에 오지 않았으니까 이 은근슬쩍 작전은 통한 것 같다. 그런데 손님은 책을 읽으면서도 계속 조르바가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을까?
세상엔 많은 사람이 있고 어쩌면 사람보다 책의 숫자가 더 많을지도 모른다. 책은 그 자체로 이야기지만, 그 책을 누가 읽느냐에 따라서는 같은 책이라도 또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책방은 이렇게 여러 가지 이야기가 겹치고 쌓여 풍성한 하루를 만든다. 책방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묘하게 설레는 기분이 든다면 바로 이런 이야기들이 웅성거리며 우리를 부르고 있기 때문이다. 책을 좋아하는 사람은 이 반가운 소리에 이끌려 자꾸만 책방을 찾는다.
윤성근 이상한나라의헌책방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