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의 새 음악예능 ‘뜨거운 씽어즈’가 지난 한 주 ‘오열버튼’ 영상으로 온라인을 뜨겁게 달궜다. 보기만 하면 무조건 운다는 뜻이다. 85세 노배우 김영옥이 부른 ‘천개의 바람이 되어’와 4살 아래 절친 나문희의 ‘나의 옛날 이야기’다. 노배우들이 긴장으로 떨리는 두 손을 꼭 잡고 노래하는 영상에는 ‘우리 엄마도 바람이 됐을까요’ ‘돌아가신 아빠 생각에 엉엉 울었어요’ ‘이유를 모르겠는데 계속 눈물이 나요’ 같은 댓글이 줄을 이었다.
대책 없이 울린다는 것 말고도 두 사람의 무대에는 공통점이 또 있다. 첫 소절부터 울컥한다는 거다. 감정도 단계를 밟아야 고조되는 법인데. 둘은 시작부터 다짜고짜 울린다. 합해서 연기 경력 120년. 노배우의 뜨거운 진심이 즉각적 감동을 만든 건 분명하다. 하지만 그뿐일까. 개인적으로 그들의 무대에서는 배우를 넘어서는 정체성, 할머니의 남다른 존재감이 느껴졌다. 핀조명 아래 살짝 굽은 등과 주름진 손, 부은 발목, 떨리는 목소리. 평생 누군가를 먹이고 보살핀 사람에게서만 풍기는 따뜻함과 평정심까지. 두 사람에게서는 할머니 아우라라고 부를 압도적 존재감이 뿜어져 나왔다. 존재가 오열버튼이었던 거다.
김영옥의 선곡은 바람이 되어 가족을 지켜주겠다는 망자의 위로를 담은 노래였다. 자신의 남은 삶과 떠난 가족을 생각했다는 김영옥은 무대를 마친 뒤 “가사 속 바람이 안쓰러웠다”며 희미하게 웃었다. 그녀는 “나도 지금 부대끼면서 열 가지 일을 하고 사는 사람인데 죽어서까지 바람이 돼 가지고(…) 그것도 좀 부산하고 힘들겠다”고 생각했노라 털어놓았다. ‘죽어서까지 지켜주는 일은 그만할게. 떠날 때는 혼자 자유로울게. 그렇다고 너희들을 사랑하지 않는 건 아니란다.’ 할머니 김영옥은 이런 생각을 했을까.
소설 속에서 비슷한 마음을 읽은 적이 있다. 엘리자베스 문의 SF소설 ‘잔류 인구’ 속 할머니 오필리아다. 오필리아는 개척민들이 떠난 식민지 행성 ‘콜로니 3245.12.’에 몰래 잔류한 70대 노인이다. 평생 가족을 건사한 그녀는 남은 생은 자신만을 위해 살기로 결심한다. 어리석고 이기적인 아들 내외까지 모두 떠나고 텅 빈 행성에 혼자 남은 그녀. 나체로 텃밭에서 채소를 키우고, 온종일 쓸모없는 비즈 목걸이를 만든다. 행복한 몇 년이 흐른 뒤 괴동물 출현으로 닥친 위기. 인간과 외계 동물이 충돌하기 직전, 할머니는 고관절이 덜그럭거리는 늙은 몸을 이끌고 양고기 구이와 호박파이를 만든다. “사람들은 늙은 여자에게 그런 걸 기대하거든. 먹이고, 보살피고, 얘기를 들어주기를.” 할머니는 칼을 가는 대신 바비큐를 구워 적을 물리친다.
아이러니하게도 가족에게서 탈출한 오필리아는 외계 종족의 대모가 됐다. 그러니 나쁜 소식은 오필리아가 애초 계획했던 대로 혼자 조용히 죽지 못했다는 것, 좋은 소식은 더 이상 아무도 오필리아를 무가치한 노인네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다. 머나먼 외계 행성에서 오필리아의 돌봄은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노동으로 존경받았다. 판타지 같은 결말이다.
내 나이가 할머니를 향해 다가가기 때문일까. 그동안에는 보이지 않던, 광대한 할머니 유니버스가 보이기 시작했다. 할머니 세계관에는 마블 히어로의 초능력 같은 깨달음이 넘친다. 인생은 좋은 것만큼이나 나쁜 것들을 남기고, 사랑하는 가족도 결국에는 떠나야 하며, 혼자 남는다고 외로운 건 아니다. 누구든 제 몫의 노동을 마치면 평화롭게 혼자가 될 권리를 가질 수 있고, 가져야 한다. 그게 할머니 세계관이다. 그러나 여전히 우리 사회의 할머니는 먹이고 보살피고 들어줄 때만 보이는 존재다. 투명인간 취급받는 그들을 압도적 카리스마로 무대 위에 올린 두 명의 할머니. 그들 덕에 할머니 생각을 한참 해봤다.
이영미 영상센터장 ymle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