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거를 싫어한다. 국민이 둘로 짝 갈라져 서로 막말과 조롱을 퍼붓는 것을 견디기 어렵다. 교회에서도 며칠 전까지 서로 고민을 나누고 함께 봉사하던 성도들의 사이가 서먹해진다. 목회자는 자칫 설교 중 단어 하나 잘못 사용하여 성도들 마음 문을 닫게 하지나 않을까 노심초사한다. 대선이 끝나 이제 한시름 놓았다 싶은데, 곧이어 지방선거, 또 얼마 후 총선이 기다리고 있다. 한숨이 나온다. 민주주의의 꽃이라는 선거가 어떻게 해서 탐욕과 어리석음과 분노가 소용돌이치는 시궁창이 됐을까. 분열을 그치고 혐오를 멈추기 위해 그리스도인이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사도 바울에게서 배워 보자. 바울은 복음을 믿은 후 그 영광의 빛 아래서 세상의 가치들을 상대화함으로 화해와 통합을 이뤘다. 예수 믿기 전 바울은 유대인의 전통과 언약과 율법을 절대적인 것으로 신봉했다. 할례를 받고 안식일을 준수하며 깨끗한 음식만 먹음으로 스스로 이방인과 분리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만나고 난 후 자신이 지금까지 껍데기를 붙들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별것 아닌 것을 가지고 죽자고 덤벼든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제일 중요한 유대인의 특권을 내려놓은 바울에게, 다른 가치들을 상대화하기는 훨씬 쉬웠다. 로마의 시민권, 그리스의 수사학, 자유인과 노예, 남자와 여자, 결혼과 비혼, 가진 자와 가난한 자, 민사재판에서의 승소와 패소, 헌금의 액수, 사도로 인정받는 것, 영적 은사의 유무, 자신이 쌓은 업적 그리고 삶과 죽음까지. 우리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모든 것을 망라하는 목록이다. 시대가 지나면서 이 목록은 변천을 거듭해 결국 21세기 대한민국의 진보·보수, 세대 간 갈등, 페미니즘에까지 다다랐다. 한 이념을 절대화하고 한 정치인을 메시아로 생각하면 거기서 분열과 갈등이 싹튼다. 반면 이것들을 상대화할 때 비로소 사회 통합이 가능해진다.
양비론(兩非論)에 빠지자는 게 아니다. 양비론은 마치 세상을 초월한 것처럼 전지적 시점에서 양쪽을 싸잡아 비판하는 것이다. 누가 당선되든, 어느 당이 정권을 잡든 다 마찬가지라는 게으르고 무책임한 태도다. 신앙 좋다는 목회자와 성도들이 빠지기 쉬운 오류다. 그러나 바울의 상대화는 양 진영에 참여하여 배우고 경험함으로 그 중요성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복음의 빛 아래서 상대적 가치만을 가진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어떤 과정을 통해 거의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경지에 이르렀을까. 첫째, 자신이 붙들고 있는 것이 얼마나 하찮은 것임을 깨달았다. 바울은 자신을 율법 교사로 자처했지만 실상은 무지한 위선자에 불과함을 알게 됐다. 선을 알지만 선을 행할 능력이 없는, 곤고하고 비참한 죄인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우리도 복음의 빛 아래서 자기를 돌아보고 현실을 숙고하자. 정치인이 약속하는 밝은 미래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 그 약속을 믿는 나의 마음속에 어떤 욕망이 꿈틀거리며 어떤 오만이 자리 잡고 있는지. 유튜브와 카카오톡의 알림 버튼을 끄고 골방으로 들어가자.
둘째, 바울은 자신이 혐오하는 상대에게도 하나님이 은혜 주시는 것을 보았다. 자신이 돌을 던진 사람이 하늘의 빛을 받아 얼굴이 빛나는 것을 보았으며, 자신이 혐오하는 사람에게 성령이 임하는 것을 목격했다. 하나님이 깨끗하다고 하신 사람을 내가 더럽다고 할 수는 없지 않은가.
복음의 영광은 모든 것에 상대적 가치만을 부여한다. 우리 사회를 찢어 나누는 이념과 가치를 상대화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은, 분노와 혐오로 상처받은 대한민국을 치유하는 데 앞장서야 할 사람들이다. 오늘도 그리스도인끼리 주고받는 악의에 받친 대화를 보면서, 복음의 영광이 사라진 것 같아 거대한 슬픔의 파도가 몰려온다.
장동민(백석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