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지혜 특파원의 여기는 베이징] 시진핑 오판에… 美-러, 러-우크라 사이에 낀 中 ‘난감’

입력 2022-03-21 04:02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18일(현지시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우크라이나 사태와 관련해 화상 통화를 하고 있다. 백악관 고위 당국자는 “현 시점에 러시아를 돕는 자에게는 후과가 있을 것이라는 점을 분명히 했다”며 “바이든 대통령이 중국에 특정한 요구를 하지는 않았지만, 현 상황에 대한 입장을 전달했다”고 설명했다. AP연합뉴스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의 지난 18일 화상 통화 직후 중국 외교부는 1600자 분량의 발표문을 냈다. 통화 내용을 정리한 이 자료에서 우크라이나 사태는 미·중 관계, 대만 문제에 이어 세 번째로 나온다.

시 주석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담판을 해법으로 제시했다. 시 주석은 “미국과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도 러시아와 대화에 나서 우크라이나 위기의 배후에 있는 문제를 해결하고 쌍방의 안보 우려를 해소해야 한다”고 말했다.

중국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서 어정쩡하게 줄타기 하는 사이 미국 등 국제사회의 대중 압박은 더 거세지고 있다. 중국이 러시아를 계속 두둔하다가는 제재의 소용돌이 속으로 함께 빨려 들어가는 형국이 펼쳐질 수 있다. 올해 가을 3연임 확정을 앞둔 시 주석으로선 경제 제재에 따른 위험과 불확실성을 감수할 이유가 없다.

그렇다고 중국은 러시아와 등을 질 수도 없는 상황이다. 시 주석과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지난달 4일 베이징 조어대 정상회담에서 “양국 우호에는 끝이 없고 협력에는 성역이 없다”고 선언했다. 러시아와 손절했다가 향후 미·중 갈등 국면에서 어떻게 뒤통수를 맞을지 모르는 일이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침공을 감행하기 직전 푸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하고, 침공 이후에도 러시아를 두둔했던 시 주석의 정세 오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고 있다.

美이어 EU도 中 압박

미·중 정상 통화에서 바이든 대통령은 중국이 러시아를 물질적으로 지원할 경우 그것이 초래할 결과를 설명했다고 백악관이 밝혔다. 그러나 중국이 직면하게 될 후과가 무엇인지, 미국이 중국에 무엇을 요구했는지는 구체적으로 설명하지 않았다. 백악관 발표는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초점을 맞췄고 대만에 대한 미국의 정책을 짧게 언급하는 수준이었다.

뉴욕타임스(NYT)와 워싱턴포스트(WP) 등 주요 언론은 바이든 대통령의 대중 경고를 중점적으로 보도했다. 그러자 중국 관영 매체가 반박에 나섰다. 글로벌타임스는 20일 “미국은 러시아의 고립을 과장하고 중국에 대한 강경함을 보여주려 한다”며 “이러한 자기기만적 움직임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이라고 주장했다. 이 매체는 또 “미국은 중국이 포괄적인 대러 제재에 동참하길 바라지만 중국은 미국에 협조할 의무가 없고 독자 제재와 같은 거친 수단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중국은 미국이 우크라이나 사태를 계기로 중·러 사이를 벌리려 한다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동시에 중국의 도움이 절실한 쪽은 미국이라는 태도를 유지하고 있다.

러시아도 중국과의 협력이 더욱 강화될 것이라고 밝혔다. 로이터통신에 따르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은 “서방이 국제 체제의 기반이 되는 모든 토대를 노골적으로 훼손하는 상황에서 우리 두 강대국(중·러)은 이 세계에서 어떻게 해야 할지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 발언이 있기 전 독일 일간 빌트는 라브로프 장관이 탑승한 항공기가 최근 중국으로 가던 중 회항한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했다.

미국에 이어 EU도 중국의 러시아 지원 가능성을 경고하고 나섰다. 익명을 요구한 EU 고위 당국자는 미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에 “EU 지도자들은 중국이 러시아에 군사 원조를 고려하고 있다는 아주 신빙성 있는 증거를 확보했다”며 “중국이 러시아의 요청을 받아들일 시 EU는 중국에 무역 장벽을 세워 제재를 부과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해 중국과 유럽연합(EU)간 교역액은 8000억 달러(972조원)를 넘어섰다. 미국과 중국은 7500억 달러, 중국과 러시아는 1500억 달러를 밑돌았다.

시험대 오른 중·러의 ‘한계 없는 협력’

중·러 사이에는 반미라는 공통 분모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가치관을 공유하거나 세부 현안에서 이해관계가 일치하는 건 아니다. 중국은 우크라이나 사태에서 러시아를 전적으로 지지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반대하지도 않는 불분명한 입장을 유지하고 있다. 전쟁이 장기화 국면에 접어들면서 중국 태도에 미묘한 변화가 생긴 건 사실이다. 중국 관영 매체는 최근 러시아군 폭격으로 발생한 우크라이나 민간인 희생을 보도하며 우크라이나의 주권 존중을 강조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 쪽으로 쏠린 무게 추가 완전히 이동한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많다.

미 CNN방송은 “시 주석이 우크라이나 사태에 어떻게 대응할지 저울질함에 따라 중·러 협력 관계가 시험대에 올랐다”고 분석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중국은 막다른 코너에 몰릴 것이란 분석이 제기된다. 러시아군의 공격으로 폐허로 변한 우크라이나 참상을 현지에서 SNS로 공유한 중국인 남성이 중국에서 반역자 취급을 받는 게 지금의 분위기다. 이렇듯 정부 입장과 다른 의견을 철저히 통제하는 중국에서조차 시 주석의 오판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새어 나오기 시작했다.

일본 언론은 이달 초 중국 최대 정치 행사인 양회(兩會) 기간 최고 지도부 사이에서 러시아를 편들며 치러야 할 대가가 너무 크다는 반성이 제기됐다고 전했다. 이러한 분위기는 시 주석 장기 집권의 걸림돌이 될 가능성이 있다.

중국 국무원 산하 공공정책연구소의 부주석이자 상하이시 당교 교수인 후웨이도 최근 미 간행물을 통해 “중국이 푸틴 대통령과의 관계를 단절하지 않으면 세계에서 고립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홍콩 사우스차이나모닝포스트(SCMP)에 따르면 이 글은 조회수 10만회 이상을 기록하며 관심을 끌었지만 중국 당국의 검열로 얼마 지나지 않아 삭제됐다. 이에 앞서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5명이 러시아의 침공을 불의의 전쟁이라고 비판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 역시 두 시간 만에 삭제됐다.


베이징=권지혜 특파원 jh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