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표는 꿈도 꾸지 마… 올해 최소 15명 ‘알박기 인사’ [스토리텔링경제]

입력 2022-03-21 00:03
대선 이후에도 공공기관 ‘알박기’ 인사가 진행되면서 정권교체기 해묵은 신구 권력 간 갈등이 이어지고 있다. 사진은 금융위원회 산하 공공기관인 한국산업은행 서울 여의도 본점 모습. 연합뉴스

최근 문재인 대통령과 윤석열 대통령 당선인의 오찬회동이 취소되면서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잡음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박근혜정부 말기 공공기관장 ‘알박기’를 비판했던 문재인정부가 인사권을 내세우며 같은 행태를 반복하고 있다는 비판도 일고 있다.

정권교체기마다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신구 권력 간 신경전이 불거지는 건 낯선 모습이 아니다. 그동안 정권이 바뀌면 ‘새 술은 새 부대에’라는 관용구처럼 공공기관의 기관장이나 정치권 출신 임원들이 잔여 임기와 관계없이 사표를 내는 게 관습이었다. 기관 운영에 정말 불가피할 정도가 아니면 대통령 임기 말에 인사를 내지 않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신구 권력 간 다툼을 최소화하기 위한 일종의 안전장치였던 셈이다.

그런데도 노무현정부 임기 말 노 대통령의 공기업 인사 단행으로 당시 야당(한나라당)이 반발하고, 이명박정부 말기에는 박근혜 당선인이 이명박정부 ‘공기업 낙하산’을 대놓고 비판하는 등 정권교체기 마찰이 일부 있었다.

문재인정부 출범 전후도 마찬가지였다. 박 전 대통령 탄핵 후인 2016년 12월 황교안 대통령 권한대행이 “경영 공백이 심하거나 대국민 서비스에 문제가 생긴 공공기관은 인사권을 행사하겠다”며 한국마사회장 등 일부 공공기관 인사를 단행하자 더불어민주당과 당시 유력 대선 후보였던 문 대통령은 강하게 반발했었다.

문재인정부 출범 직후 불거진 ‘환경부 블랙리스트 사건’도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권력 다툼이 발단이었다. 이전 정권에서 임명된 산하기관 임원에게 사표 제출을 요구한 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직권남용 혐의로 실형을 선고받으면서 그동안의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관습이 변곡점을 맞았다. 전 정부에서 임명된 공공기관 임원이 정권이 바뀐 후에도 임기를 채울 수 있게 된 계기로 작용하고 있다.

국민일보가 20일 공공기관 경영공시 사이트 알리오에서 351개 공공기관의 임원 현황을 분석한 결과, 올들어 최소 15명의 ‘낙하산’ 공공기관 임원이 임명된 것으로 확인됐다. 대선 이튿날에도 낙하산 인사는 예외가 없었다. 지난 10일 임명된 임찬기 한국가스안전공사 상임감사는 민주당 당직자 출신으로 현 정부에서 청와대 민정수석실 선임행정관을 역임했다. 지난달 임명된 신동화 한국도로교통공단 비상임이사, 명희진 한국남동발전 상임감사, 김명수 한국남부발전 상임감사는 모두 민주당 보좌진 출신이다. 지난 8일 제주국제자유도시개발센터(JDC) 이사장에 임명된 양영철 전 제주대 교수는 대선 캠프 출신이다. 정혜승 전 청와대 디지털소통센터장은 지난달 환경보전협회 비상임이사에 임명됐다. 민주당 보좌관 출신인 신승표 국립공원공단 비상임이사도 당초 다음 달 말 임기 만료를 앞두고 최근 임기를 1년 연장했다.


최근에는 주로 국토교통부나 산업통상자원부 산하 공공기관에 낙하산 인사 임명이 많았다. 지난달 취임한 윤형중 한국공항공사 사장은 현 정부에서 청와대 사이버정보비서관, 국정원 1차장을 지낸 안보 전문가이지만 공항 관련 경력은 없다. 지난해 11월 인천국제공항공사 비상임이사로 임명된 배재정 전 의원 역시 언론인 출신이다. 한국동서발전과 중부발전에도 각각 노무현재단 연구본부장 출신인 김상철 상임감사와 박범계 법무부 장관의 특보를 지낸 곽영교 상임이사가 지난해 9월과 11월에 각각 선임됐다. 탈원전론자인 김제남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이 지난달 한국원자력안전재단 이사장에 임명되고, 다음 달 임기 만료를 앞둔 정재훈 한국수력원자력 사장의 1년 연임이 추진되는 등 에너지 정책 전환을 앞두고 ‘탈원전 알박기’로 의심되는 사례도 나왔다. 임명된 인사 대부분은 임기가 2~3년이라 최소 1년 이상 새 정부와 어색한 동거를 해야 한다. 상임기관장 잔여 임기가 1년 이상 남은 공공기관도 234곳에 달한다.

공공기관 알박기 논란에 대해 청와대는 “인사권은 대통령의 정당한 권한”이라고 주장한다. 실제 정권이 바뀌었다는 이유만으로 공공기관 임원을 싹 갈아치우는 관행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는 목소리도 없지 않다. 김태윤 한양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기관 임원에게 임기를 보장하는 건 정치 상황과 별개로 공공기관이 달성해야 할 임무를 책임지고 수행하라는 취지”라고 설명했다. 다만 김 교수는 “해당 인사가 능력과 자질을 갖췄다는 게 기본 전제”라며 “능력과 자질이 검증되지 않은 ‘우리 편’을 낙하산으로 보내는 건 제도 취지에도 안 맞고 인사권자의 기본 양식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공공기관 인사를 둘러싼 갈등을 줄이려면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박형준 성균관대 행정학과 교수는 “공공기관은 정책 집행 기관으로 정권과 같이 갈 수밖에 없는 측면이 있는데 공공기관장 임기와 대통령 임기가 다르다 보니 문제가 생기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2년이나 3년인 기관장 임기를 2년6개월로 해서 대통령과 교체 시기를 비슷하게 하거나 미국의 ‘플럼북(Plum Book)’ 제도를 참고해볼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미국에서는 대선이 끝나면 차기 대통령이 인사권을 행사할 수 있도록 의회가 대통령이 임명권을 갖는 행정부와 공공기관의 직책 리스트와 이 직책에 필요한 자격 요건을 규정한 플럼북을 공개 발행한다. 대통령 인사권을 앞세워 전문성 없는 인사가 임명되는 걸 방지하고, 차기 대통령의 인사권을 보장해 갈등을 줄일 수 있다.

세종=이종선 심희정 기자 rememb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