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전 순결은 이 시대 청년들에게 고리타분하게 느껴질 뿐이다.
누가: 혼전순결주의자고 혼전순결이 필요하다고 생각은 하지만 고리타분하게 느껴지는 건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가 안부 인사로 “남자친구랑은 잤어?”라고 물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막상 교회 안에서도 혼전순결을 지켜야 한다고만 배웠지 ‘왜?’라는 질문에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변을 들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요셉: 또래들 사이에선 혼전순결이 멋없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욜로(YOLO)’가 대두되면서 “한 번 살면서 그 시간들 아깝게 보낼 거냐”란 얘기도 듣는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교회 안에서 이미 혼전순결을 지키지 못한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반응이다. 그 사람을 비난의 대상으로 볼 게 아니라 성적인 부분 외에도 앞으로 어떻게 하나님 안에서 ‘순결’하게 살아갈 수 있는지 함께 고민하는 과정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나단: 결혼을 결정할 때 “속궁합 봐야 한다”는 얘기가 익숙해진 지 오래다. 혼전순결에 대해 납득이 가도록 설명하려고 해도 쉽지 않다. ‘나의 소중한 것을 가장 소중한 사람한테 주는 것’ 정도로 얘기하곤 하는데, 또래 청년들에게는 공감이 안 되는 얘기다. 그렇다고 장황하게 설명하려 하면 거부감으로 돌아온다.
노아: 고리타분하게 느끼는지를 떠나 청년들이 혼전순결에 무관심하다는 생각도 든다. 혼전순결이 자발적일 수도 있지만 비자발적일 수도 있다. 혼전순결을 바라보는 시각에 나름의 재해석이 이뤄지고 그 자체가 여러 성향 중 하나로 가볍게 느껴지는 것 같다.
나단: 스스로 책임질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쾌락을 누려야 한다는 생각이다.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까지 내 행복을 추구하는 건 상식적이지 않다고 본다.
노아: 크리스천이라면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쾌락의 폭을 줄여보도록 노력할 수 있지 않을까. 꼭 혼전순결이 아니더라도 성경적이지 않은 것, 주님 앞에서 스스로 부끄럽다고 생각될 만한 것들을 선택에서 제외하는 게 크리스천으로서 가져야 할 신념이 아닐까.
나단: ‘쾌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부정적 뉘앙스가 있는 것 같다. 우리가 ‘즐거움’을 어디까지 추구할 것인가를 두고 ‘일탈’에 초점을 두는 게 아니라, 절제하면서 내 삶을 지혜롭게 운영해나가는 부분에서도 충분히 성취감과 즐거움을 느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 측면에서 보면 교회가 추구할 수 있는 즐거움의 종류는 더 다양해질 수 있다.
-동성애를 대하는 교회 안의 모습이 성경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한다.
누가: 죄를 지적하는 건 성경적인데 그 방식은 성경적이지 못하다는 느낌을 받는다. 어떤 말을 하고 싶은 건지는 알겠지만 표현 방식에 공감이 안 된다.
나단: 동의한다. 하나님 앞에서는 모두가 죄인이고 누구나 죄를 짓는다. 우리는 사실 죄로 망가져 있는 존재들이잖나. 동성애로는 발현되지 않았지만 다른 방식으로 망가진 부분들이 있다고 본다. 이를 인정하고 서로 보듬어가는 지혜가 필요한 것 같다.
노아: 어느 날 교회 다니던 한 친구가 내게 커밍아웃을 한 적이 있다. 교회 안에서 동성애를 정죄하려는 목소리에 상처를 입었다는 고백을 들었다. 내게는 그 친구가 동성애자이든 동성애자가 아니든 중요하지 않았다. 한 가지를 분명히 말했다. 동성애자가 배척되는 세상을 바라지 않는다고. 하지만 나의 자녀 세대에게 동성애가 스스럼없이 권유되는 세상도 원하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정도로만 얘기했는 데도 그 친구가 큰 위로를 받았다. 예수님이라면 그들을 정죄하는 대신 그들과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셨을 거라 믿는다.
요셉: 내가 속한 공동체에서만큼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No 인정’을 들었다. 동성애가 죄인 건 맞지만 크리스천들이 일상적으로 수도 없이 짓고 있는 죄보다 더 무거운 죄라고 규정할 수 있는 기준이 있는 건 아니지 않은가.
누가: 끊을 수 없는 필연적인 이끌림에 의해 동성애자가 됐다고 말하기도 한다. 하지만 일반 성도들도 필연적으로 죄를 짓는다. “나 또한 당신과 같은 죄인이다. 당신에게도 그리스도의 구원이 필요하고 당신에게 필요한 그 구원이 나에게도 필요하다”라고 말해주면 어떨까 싶다.
-MZ세대는 기성세대에게 충분히 기대받지 못하는 존재라고 생각한다.
노아: ‘No 인정’을 들긴 했지만 방향성이 좀 다르다. 기대를 아예 안 한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그 이유는 MZ세대가 기성세대와 동등한 위치를 갖고 있지 않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한 세대가 성장하고 힘을 길러 세대교체가 이뤄지는 건 독립된 자주권을 넘겨받는 거라고 생각을 한다. 하지만 현재 MZ세대는 교회 내에서 온전하게 독립하지 못한 채 기성세대의 울타리 안에 있는 경우가 많다. 당연히 기성세대가 MZ세대를 완전히 자랐다고 생각할 리 없다. 그래서 기대를 받지 못하는 것이고 그렇기에 실망할 일도 없는 것 아닐까.
누가: 나는 교회뿐 아니라 사회에서도 기성세대들이 MZ세대에 대한 기대를 놓지는 않았다고 생각한다. ‘90년대생이 온다’ ‘MZ세대 분석’ 등의 책들이 계속 나오고 조명되는 걸 보면 더욱 그렇다. 회사 대표님이 젊은 세대와 소통해보려고 MBTI 해보고 말을 건다. 그런데 정작 MZ세대가 선을 긋는 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노아: 세대와 관련된 이야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 ‘꼰대’라는 개념인 것 같다. 내가 생각하는 꼰대의 기준은 단지 젊은 세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게 아니다. 자기 세대의 가치관에 모든 것을 대입해 현세대를 바라보고 그게 맞다고 관철하려는 것이다. 기성세대가 하나의 기준을 단정하거나 재단하려 하지 않고 MZ세대의 의견 또한 수용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
나단: 꼰대와 조언자의 차이는 ‘내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주는 것’과 ‘상대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는 것’에 있는 것 같다.
-내가 기대하는 교회의 모습, 내가 지향하는 청년 크리스천의 모습은?
노아: 편견에 묶이지 않는 게 지금 교회가 나아가야 할 목표 지점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적 원리와 상반되는 개념들이 사회에서 통용되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비판적인 시각으로만 바라보지 않는 게 교회가 사회로부터 배타적이란 편견을 받지 않는 출발점이라고 본다. 위드 코로나 시대의 청년 크리스천으로서 더 활발하게 쌍방향 소통을 할 수 있는 전도 방향을 모색하는 것도 소명이라고 생각한다.
누가: 한 마디로 ‘사랑’이다. 기독교 신앙의 유무를 떠나 모든 사람은 무언가에 의존하고 기대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부모가 아이에게 주는, 때로는 맹목적이고 헌신적인 사랑을 세상에 흘려보내는 게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방향 아닐까 싶다. 그리고 크리스천 청년들이 더 많이 사랑받았으면 좋겠다. 받아봐야 줄 수 있으니까.
요셉: 세상은 변화무쌍하지만 진리는 변하지 않는다. 교회가 세상과 타협하고 어떤 상황에 조급하게 대응하기보다 올바른 가치를 세우고 전하며 누구든지 와서 위로를 받을 수 있는 든든한 공동체가 됐으면 좋겠다. 크리스천 청년들이 세상 가운데 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할 것 같다. 어렵지만 멈추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나단: MZ세대는 ‘왜’를 중시한다. 어떤 일을 하더라도 스스로 납득이 안 되면 동기부여가 안된다. 교회도 성경적 진리를 MZ세대의 언어로 설명할 수 있는 실력을 키워야 할 것 같다. MZ세대는 능력주의가 팽배한 시대를 살면서 불투명한 미래 때문에 과도하게 경쟁하고 불평등과 불공정에 예민하다. 미래에 대한 불안감, 어려움을 주님께 맡기고 평안을 얻을 수 있는 길을 안내했으면 좋겠다. 크리스천 청년으로서 그 길의 안내자가 될 수 있도록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야 할 것 같다.
최기영 기자 ky710@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