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안에서 즐겨 바보되기’를 자처하셨는데…

입력 2022-03-21 03:02

“주 안에서 즐겨 바보 되고, 주 위해서 기뻐 손해 보라.”

성산 장기려 박사가 생전 규장문화사 설립자인 여운학 장로에게 선물한 묵필 ‘주 안에서 바보 되고 주 위해서 손해 보라’는 문구에서 비롯한 말이다. 여 장로는 2000년부터 이 문구에 ‘즐겨’ 바보 되고, ‘기뻐’ 손해 보자고 보충해 좌우명으로 삼았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롬 8:28) 그리스도인의 낮은 자세를 떠올리게 한다.

한국 기독출판의 산증인 여운학(사진) 장로의 천국환송예배가 19일 오전 5시 서울 강남구 삼성서울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렸다. 여 장로는 지난 15일 90세 일기로 별세했다. 새벽 비가 내리는 가운데 열린 발인예배는 ‘303비전 이슬비 장학회’ 소속 목회자들의 주관으로 드렸다.

‘303비전’은 30년 곱하기 3세대, 즉 백년대계의 다음세대 신앙 전수를 말한다. ‘이슬비’에 옷 젖듯 말씀 암송으로 믿음을 세워가자는 의미를 담고 있다. 교단을 초월해 2년마다 뽑았던 신학대학원 장학생이 10기까지 이어지면서 90여명의 중견 목회자를 배출했다. 여진구 규장·갓피플 대표를 비롯한 다섯 형제 유가족과 장학회 소속 목회자들은 예배 가운데 서로를 위로하며 고개를 숙였다.

목회자들은 자신을 가족처럼 사랑해준 여 장로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 장학회 2기 한창수 목사는 “말씀 암송 카드를 준비해 매일 새벽기도 셔틀버스 안에서 성도들과 나누는 등 마지막까지 말씀 암송을 통해 주님과 동행하셨다”고 밝혔다. 3기 강신욱 목사는 “소년처럼 해맑은 미소, 역삼각형 몸매 유지를 위한 팔굽혀펴기, 온화하고 인자한 음성이 생각난다”며 울먹였다. 5기 강동협 목사는 “괘종시계 유품을 제게 남기셨다”고 말했다. 괘종시계는 여 장로가 1978년 규장 설립 이후 사채를 끌어다 쓰면서 어렵게 기독출판을 이어가는 와중에 얻은 것이다. 작은 서고에 이웃한 괘종시계 회사의 실수로 화재가 나 당장 팔아서 고리대금업자의 빚을 갚아야 할 책들이 불에 타자 여 장로는 황망한 나머지 대낮의 목욕탕 한증막에 들어가 눈물로 부르짖으며 기도했다. ‘주여 어찌하오리까’를 외치며 통곡하는 가운데 여 장로는 번갯불처럼 음성을 들었다고 했다. ‘두 서고 중 작은 서고만 타고 큰 서고는 온전한데 투정만 하느냐.’ 깨달음을 얻은 여 장로는 파산 위기의 괘종시계 업체 사장에게 전화해 “화재로 인한 배상은 요구하지 않겠으니 안심하시라”면서 “희망을 버리지 마시고 다시 일어날 생각만 하십시오”라고 전했다. 괘종시계는 이후 업체 사장이 보내온 것으로, 시간마다 뎅 뎅 뎅 소리를 울리며 여 장로에게 ‘롬팔이팔’(로마서 8장 28절)을 떠올리게 했다.

여 장로는 40세에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여 교과서를 만들던 출판인에서 기독출판사 규장 대표로 거듭났다. 가나안농군학교 김용기 장로, 한국의 슈바이처 장기려 박사, 한경직 영락교회 목사, 조용기 여의도순복음교회 목사 등의 저작물을 펴냈고 평생 말씀 암송 사역을 강조했다.

우성규 기자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