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러시아 보이콧이 불붙인 반전 여론

입력 2022-03-21 04:05

러시아에서 생방송 중이던 스튜디오에 난입해 반전 시위를 벌이다가 붙잡힌 여성이 최근 벌금형을 받고 풀려났다. 기습 피켓 시위로 세계의 이목을 끈 이 여성은 러시아 국영방송 채널1의 편집자 마리아 오브샤니코바였다. 그는 15일(현지시간) 법원을 나오면서 “내 생각을 표현한 데 만족한다. 더 중요한 것은 새로운 움직임이 일고 있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다른 언론인들도 자기처럼 반전 활동에 동참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한 말이었다.

러시아 정부는 이미 자국민의 반전 활동에 골머리를 앓는 상황에 이르렀다. 반전 여론에 불을 댕긴 건 국제사회의 대러 경제 제재였다. 미국과 유럽연합(EU)이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 결제망에서 러시아를 퇴출키로 한 데 이어 글로벌 기업들까지 ‘러시아 보이콧’에 동참했다. 경제 제재는 그야말로 전략무기급 파괴력을 발휘했다. 루블화 가치는 폭락했고, 러시아 곳곳의 마트는 사재기 인파로 북적였다. 러시아인들은 일부 신용카드뿐 아니라 구글페이 같은 결제시스템을 활용한 교통카드도 못 쓰게 됐다. 비자와 마스터카드, 구글, 애플 등이 러시아 서비스를 중단했기 때문이다. 애플의 신제품을 한동안 살 수 없게 된 러시아인 사이에선 “최신형 아이폰? 그건 지금 네 주머니에 있는 아이폰”이라는 우스갯소리까지 나온다고 한다.

나이키, 이케아뿐 아니라 세계 최대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 넷플릭스와 워너브러더스, 유니버설 등 영화사들도 보이콧에 동참했다. 모스크바의 쇼핑센터에선 샤넬과 프라다, 구찌 등의 매장도 문을 닫았다. 에어비앤비는 러시아 지역 영업을 중단한 데 이어 우크라이나 인접 국가들의 숙소를 난민들에게 무료로 제공키로 했다.

가장 인상적인 장면은 러시아인들이 즐겨 찾는 맥도날드가 여론에 떠밀리듯 뒤늦게 대러 제재에 동참한 것이었다. 맥도날드의 모스크바 1호 매장은 1990년 처음 문을 열었을 때 수만명이 몰려들면서 성황을 이뤘다. 당시엔 러시아 개방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맥도날드가 최근 러시아 매장 850곳을 임시 폐쇄키로 결정하면서 러시아 고립에 힘을 보탰다.

러시아 내부의 반전 구호는 점점 커지고 있다. 러시아를 아예 떠나는 러시아인도 부쩍 늘고 있다. 전범 국가라는 국제사회의 비판은 제쳐 놓더라도, 앞으로 국제적 고립과 경제난을 쉽게 감당할 수 있는 러시아인은 별로 없을 것이다. 주요국 정부와 글로벌 기업의 경제 제재가 언제까지 이어질지도 알 수 없다. 러시아의 침공이 멈추더라도 제재는 한동안 유지될 수 있다.

외교·안보 분야의 전문가들은 러시아 침공 사태와 함께 세계에서 가장 폐쇄적인 북한의 문제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무력 도발의 수위를 높이거나 핵무기 개발을 본격적으로 가속화할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 것이다. 더욱이 핵을 포기한 우크라이나의 현실이 북한에 그릇된 시그널로 작용할 수 있다. 북한은 또 러시아 내부에서 고개를 든 반전 여론을 반면교사 삼아 봉쇄의 문을 더 굳게 걸어 잠글 수 있다.

획기적 전환기를 맞은 듯했다가 원점으로 돌아간 남북 관계는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더 암울해진 상태다. 불과 몇 년 전 국내 한 관료는 “평양 한복판에 맥도날드가 문을 열고, 원산에 카지노 관광단지가 들어서는 일이 벌어질 수 있다”고 했었는데 말이다. 물론 한반도 평화프로세스를 제대로 추진하지 못했다 해서 이를 깨는 방향으로 유턴만 해서는 안 된다. 꽁꽁 닫힌 북한을 개방 경제로 조금씩 바꾸는 노력을 병행하지 않는다면 북한을 근본적으로 변화시킬 수 없다는 점을 간과해선 안 된다.

김경택 경제부 차장 pty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