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으로 내 발로 찾아가 사주를 본 게 몇 년 전이었다. 지인이 노후를 대비해 명리학 공부를 시작했다며 사주풀이를 해줬는데 그럴듯했다. 재밌어했더니 진짜 고수를 만나보라고 했다. 자기 스승님인데 연구하고 가르치는 분이라 사주는 알음알음 연결된 사람들만 봐준단다. 유명인들이 줄을 선다더니 과연 예약이 밀려 있어 몇 주 뒤에 만나기로 했다. 지인은 무엇보다 질문을 잘해야 한다며 궁금한 것들을 구체적으로 물어보라는 조언도 해줬다.
서울 공덕역의 카페에서 만난 명리학 선생님은 말끔한 슈트 차림이었다. “당신은 밤이에요. 밤하늘에 달빛이랄까, 등불이랄까. 불빛이 하나… 아니 두 개가 있는 그림이에요.” 나의 출생 연월일시를 듣고 한동안 가만히 헤아려 보더니 처음으로 해준 얘기였다. 맞아, 내가 원래 낮보다 밤에 컨디션이 좋은 사람이다. 달도 좋아한다. 가로등이면 또 어떠랴, 빛이 두 개라는데! 그는 고수 같았다. “어둠을 밝히는 일들을 하면 본인과 잘 어울릴 거예요. 어려운 사람을 돕거나, 모르는 것을 알려주는 일이라거나… 밤 시간대에 일하는 직업도 괜찮고….”
첫 문장에 꽂혀서 뒤의 대화들은 잘 기억도 안 난다. 구체적인 질문은커녕 “어디 크게 아픈 데 없나요, 일은 잘될까요, 결혼은 할까요” 같은 우문들만 우물거렸던 것 같다. 어쨌든 그날의 소득은 마음속에 달빛 하나, 가로등 불빛 하나가 있는 밤의 이미지가 확실히 새겨졌다는 것이다.
나는 그 밤이 싫지 않았다. 어둡기만 한 밤이 아니라니까. 빛들은 밤을 밝히고, 밤은 빛들을 품어준다. 그게 내 운명이라니, 밤과 어둠에 대해 그 어둠을 밝히는 일에 대해 종종 생각해 보곤 한다.
나는 어둡고 슬픈 쪽으로 마음이 기운다. ‘나의 아저씨’나 ‘인간실격’ 같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그림도 그렇다. 얼마 전 허승희 작가의 전시를 보러 갔다. 작가는 사람의 뒷모습을 주로 그리는데, 모노톤의 작품 안에는 쓸쓸하면서도 담담한 정서가 담겨 있다. 물감을 바르고 긁어내고 다시 칠하고 긁어내기를 반복하며 표면을 거칠고 두껍게 쌓아갈수록, 작품 안의 여백은 깊고 부드럽다. 생각에 잠긴 듯 어깨가 약간 굽은 자세를 하고 있는 인물들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있으려니 나도 무방비 상태가 된다. 저 사람에게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 어깨에 가만히 손을 얹고 싶다. 어쩌면 나는 그림이 아니라 그늘진 사람을 좋아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전시장 한편의 작가노트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저는 매일 어둠 속에 익숙해지리라 마음을 추스르고 어둠을 용서하기 위해 작고, 왜소하고, 허약하며, 외로운 인간이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황현산의 인터뷰도 함께 인용돼 있었다. “나이가 들면 어둠은 더욱 많아집니다. 하늘을 꿰뚫을 것처럼 빛나는 순간은 아주 가끔이죠. 그래도 다행인 것이 나이가 들면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을 용서하게 된다는 것이에요.” 어둠에 익숙해진다는 것은 무엇일까. 어둠을 용서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운명에 밤을 품고 있는 자로서, 어둠을 향해 정진하는 예술가들 앞에서 조금 부끄러워졌다. 갑자기 어둠을 만나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다가 시간이 지나면 조금씩 무언가 감각할 수 있게 된다. 나는 그 막막함과 답답함의 시간들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일까. 어둠에 익숙해지고, 어둠을 용서할 수 있는 사람일까. 작은 촛불이라도 돼 어둠을 밝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
현실에선 매일 운명을 거스르는 일들이 벌어진다. 어둠의 기질을 타고났으면서도 나는 여전히 어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어둠의 기미라도 보이면 허둥대며 도망치고 싶은 생각부터 든다. 나는 망연자실해 공덕역에서 만난 고수가 사실은 돌팔이가 아니었을까 의심하고 만다. 언젠가 내가 어둠 속에서 작은 빛을 켤 수 있을 때까지, 나의 어둠을 만나는 사람들이여, 부디 용서해주길.
정지연 (에이컴퍼니 대표·아트디렉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