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시대’는 다시 가능하다

입력 2022-03-17 19:11
1950년대 미국 텍사스의 작은 마을에 있는 영화관이 문을 닫게 되는 과정을 통해 공동체주의가 무너지는 시대상을 그려낸 영화 '라스트 픽쳐 쇼'의 한 장면. 소년들이 차를 몰고 은퇴한 카우보이 샘이 운영하는 영화관으로 가고 있다. 페이퍼로드 제공

로버트 퍼트넘(하버드대 교수)은 미국 대통령들을 자문해온 정치학자이자 ‘나 홀로 볼링’ ‘우리 아이들’ 등을 쓴 베스트셀러 작가다. 올해 80세가 된 퍼트넘이 이 두꺼운 책을 쓴 이유는 우연히 발견한 통계적 곡선 때문이었다. 19세기 말부터 현재까지 미국의 125년 역사 위에 그려진, 뒤집어진 U자 모양의 곡선.


소득과 부의 집중도를 중심으로 한 경제적 평등 그래프에서도, 정치적 공동체 정신을 측정한 그래프에서도, 사회적 유대감을 나타낸 그래프에서도, 문화적으로 공동체 가치를 얼마나 실천했는지 표시한 그래프에서도 뒤집어진 U자형 곡선이 보였다. 미국의 경제, 정치, 사회, 문화의 핵심 지표를 긴 시간 주기 위에 표시한 네 가지 그래프가 동일한 패턴을 나타낸 것이다.

이 그래프들은 1890년대 저점에서 출발해 1960년대까지 50∼60년간 지속적으로 상승곡선을 그리다가, 70년대 이후 꾸준히 하향해 2010년대에 1890년대 수준의 저점에 도달했다. 곡선의 방향이 상승에서 하강으로 변한 시점 역시 1960년대로 동일했다. 이것이 우연일까. 그리고 이 역사의 패턴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궁금증이 은퇴를 고민하고 있던 노교수 퍼트넘을 다시 연구로 밀어 넣었다.

뒤집어진 U자형 곡선에 압축된 미국

책은 광범위한 데이터를 통해 미국의 20세기가 뒤집어진 U자형 곡선으로 전개됐음을 보여준다. “1913년에 미국인 최상위 1%는 국민 소득의 19%를 가져갔으나 1976년에 이르러 그 점유율은 10.5%로 거의 절반 가까이 떨어졌다” “(법인세는) 1909년의 1%에서 꾸준히 상승하여 1968∼69년에 53%로 최고점을 찍었고 그 후 1970년에서 2018년에 이르기까지 계속 떨어졌다” “‘우리’라는 폭넓은 인식이 1900∼1965년 기간의 미국적 정체성들을 특징짓고 있다. 이 기간에 당파적 정체성과 정서적 양극화는 다소 완화되었다” “‘가정의 단란함’은 1960년에 최고점에 도달했다. 이때 중년의 미국인 80%가 결혼을 했는데 결혼 평균 연령은 21세였다” “미국인들은 1890년대에서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사회적 유대를 강화해 왔다”….


뒤집어진 U자형 곡선은 미국의 20세기를 압축한다. 퍼트넘은 이 곡선으로 미국의 지난 125년 역사를 전반기 60여년의 상승기와 후반기 60여년의 하강기로 설명한다.

“도금시대(1870∼90년대)에 바로 뒤이어서 불완전하지만 안정된 상승추세가 60년 동안 전개되었다. 이 시기에 경제적 평등, 공공 분야의 협력, 사회의 안전한 구조, 연대의 문화 등은 더욱 강력해졌다. 1960년에 이르는 20세기의 첫 60년 동안 우리는 도금시대에 생겨난 경제적 간극을 메웠다.”

간단히 말해 미국은 20세기 첫 60년 동안 극적이면서도 다면적인 ‘업스윙’(upswing·상승추세)을 경험했다. 이 시기를 통해 미국은 더 평등하고, 협력적이고, 화합을 지향하는, 이타적인 국가로 변모했다. 하지만 1960년대 중반에 들어와 60년에 걸친 경제, 정치, 사회, 문화 분야의 상승추세가 갑자기 방향을 바꿔 추락하기 시작했다.

“1960년대 중반에서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여러 객관적 증거들과 수치들은 우리 사회에서 경제적 평등이 후퇴하고, 공공 분야의 협력이 악화되었으며, 사회의 안전한 구조는 금이 가고, 연대의 문화가 문화적 나르시시즘으로 변질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60년대 중반 이후 미국 사회의 사회·경제적 간극은 다시 빠르게 벌어졌다. 지금은 제2의 도금시대가 도래한 듯한 절망감과 분노가 차오르고 있다. 저자는 불평등, 정치적 양극화, 사회적 혼란, 문화적 나르시시즘 등을 거론하며 “1870년대, 1880년대, 1890년대의 미국은 오늘날의 미국과 놀라울 정도로 비슷하다”고 말한다.

‘나-우리-나’서 ‘나-우리-나-우리’로

미국의 20세기는 경이로운 진보에 이어 절망적인 퇴행이 이어졌다. 퍼트넘은 이를 ‘나-우리-나’로 해석한다. 100여년 전 극심했던 ‘나’ 사회에서 ‘우리’ 사회로 힘차게 업스윙을 했고, 1960년대 도달한 우리 사회의 정점에서 방향을 틀어 다시 나 사회로 나아갔다는 것이다. 나 사회는 개인주의 사회, 우리 사회는 공동체주의 사회를 말한다.

퍼트넘은 그러면서 미국 역사를 ‘나-우리-나-우리’로 전개시킬 수 있을지 탐구한다. 그가 찾아낸 해답이 바로 업스윙이다. 퍼트넘은 현재의 불평등하고 분열된 미국을 우리 사회로 바꾸기 위해 필요한 것이 업스윙이라고 본다. 좋았던 어느 시절, 예컨대 1960년대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1970년대 이후의 긴 하향 추세를 돌려 다시 올라가는 것, 상승 추세를 만들어내는 것이 필요하다고 본다.

업스윙은 100년 전 미국이 이미 경험했던 것이다. 책은 100년 전 업스윙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업스윙이 1960년대 왜 갑자기 끝났는지 그 이유를 깊게 분석한다. 이런 분석에선 통상 경제적 불평등이나 정치적 양극화, 사회적 격변 등이 방향 전환의 주된 동인으로 불려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은 통계적 증거에선 정치나 경제가 오히려 사회 변화에 후행함을 보여준다며 문화적 변화가 사회·경제적 변화를 선도했을 가능성에 무게를 둔다. 여기서 문화적 변화란 주로 개인주의와 공동체주의 사이에서 사고방식 변화를 말한다.

책의 마지막 장은 100년 전 업스윙을 누가 만들었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그들은 어떤 하나의 정당도, 하나의 정책이나 공약도, 한 명의 카리스마 넘치는 지도자도 아니었다. “전체적으로 ‘진보주의자’라는 초당적 입장을 자처한 미국인들”이었다. 이들이 보통 선거에 의한 상원의원 선출, 여성 참정권, 연방 소득세, 보호적 노동법, 최저임금, 무상 공립 고등학교 교육 등 20세기 전반기의 엄청난 진보를 이뤄냈다.

“이들 모두 개인적으로는 시민에 불과했으나, 양심과 정치적 권리를 의식하고, 계층 간의 연합을 구축하고, 민중을 조직하고, 정치적 옹호에 관한 무수한 행동에 관여했다.”

경제적 불평등, 이념적 양극화, 무능하고 부패한 리더십, 점점 늘어나는 혐오와 차별 등에 분노하면서도 별수 없다며 견디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 책은 다시 좋은 사회를 만들 수 있다는 용기를 준다. 사람들이 꿈꾸는 대로 개혁과 진보가 이뤄지고 모두가 공동체를 생각하던 시대가 있었다는 것, 시민들의 참여와 운동으로 그런 시대를 열었음을 알려준다.

김남중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