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국가 부도’ 사태가 기정사실화되면서 러시아 국채 가격이 바닥을 치고 있다. 상습 부도 국가인 아르헨티나의 사상 최저 기록도 깨질 분위기다. 시장은 러시아가 세계 금융 시스템에 다시 진입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미국 경제매체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5일(현지시간) 2026년 만기 러시아 국채 가격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액면가의 10% 아래로 하락했다고 보도했다. 이는 5년 전 디폴트(채무불이행) 상태에 빠졌던 베네수엘라 채권 가격과 비슷하며 수차례 디폴트를 선언했던 아르헨티나 국채 하한선에도 근접한 수준이다.
어드밴티지데이터에 따르면 달러 표시 러시아 국채는 우크라이나 침공 전에는 달러당 100센트 안팎에서 거래됐지만 현재는 달러당 8센트까지 내려왔다. 펀드매니저들은 5센트에서도 거래가 이뤄지고 있다고 말했다. 2009년 글로벌 금융위기 당시 아르헨티나 채권 가격이 달러당 6센트였다.
국채 가격 폭락을 부른 러시아의 디폴트 가능성은 16일 첫 분수령을 맞는다. 러시아는 2건의 달러화 표시 국채에 대해 1억1700만 달러(1450억원)의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늦어도 30일간의 유예기간 내 이자를 지급해야 한다.
러시아는 서방의 제재로 국제은행간통신협회(SWIFT·스위프트)에서 퇴출되면서 중앙은행의 달러 외환보유고 접근이 어려워지자 서방의 제재가 풀리기 전까지 달러화 국채 이자를 루블화로 상환할 계획이다.
그러나 국제 신용평가사 피치는 이날 러시아가 루블화로 이자를 지급하는 것을 인정하지 않겠다고 밝혔다. 이어 루블화로 이자가 지급되고 유예기간이 지나면 이 국채 2건의 신용등급을 디폴트를 나타내는 ‘D’로 강등하고 러시아의 장기신용등급을 ‘제한적 디폴트’로 낮출 것이라고 예고했다.
WSJ는 디폴트 선언 시 러시아가 국제 금융시장에 복귀하려면 수십년까지도 걸릴 수 있다고 내다봤다. 아르헨티나는 디폴트 후 15년간 국제 자본시장에서 자취를 감췄었다.
채권자들은 투자금 회수 기간이 길어질 것에 대해 우려하고 있다. 제이 뉴먼 전 엘리엇매니지먼트 포트폴리오 매니저는 “채권 보유자들이 러시아의 해외자산을 압류하기 위한 소송에서 이기더라도 러시아를 상대로 법원 결정을 집행하는 것은 매우 어려울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를 채무조정을 위한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것부터 쉽지 않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에 따르면 지난해 기준 러시아 채권의 약 80%는 국내 투자자들이 보유하고 있다. 러시아가 석유 수출 등으로 현금 보유를 늘리면 해외 투자자들에게는 협상 가능성이 줄어든다. 더구나 해외 채권단이 러시아와 채무조정에 나서는 것 자체로도 현재의 미국과 유럽연합(EU) 제재에 위반된다.
기시다 후미오 일본 총리는 16일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에 대해 무역상 우대조치인 ‘최혜국 대우’를 철회한다고 발표했다. 사치품 수출과 일부 물품 수입도 금지하기로 했다.
임송수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