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샛강에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입력 2022-03-17 04:05

‘개판 오분전’과 관련해 목회자들에게 들은 이야기다. 강아지들이 출몰하는 어지러움을 속되게 이르는 말이 아니라고 했다. 6·25전쟁 당시 부산을 비롯한 피란지에서 미국 영국 등의 세계 교회로부터 들여온 옥수수 밀가루 등을 넣고 끓인 가마솥 나무판 뚜껑을 열기 직전, 인파가 구름같이 몰려든 상황을 한자로 표현한 ‘개판 오분전(開板 五分前)’이었다. 국립국어원은 이 말의 유래에 대해 “검토할 자료가 없어 유래를 확인하기 어렵다”면서도 “다만 표준국어대사전에는 ‘개판(開版)’을 ‘출판물을 처음 찍어 냄’이라고 소개하고 있다”고 안내한다.

포화 속에서 세계 교회는 생명과 직결된 구호물자에 더해 출판물도 보냈다. 바로 성경이다. 1952년 미국 교회와 영국 교회의 후원으로 ‘기쁜소식 누가복음’ 10만부가 일본에서 인쇄돼 유엔군 군함을 타고 부산항으로 들어온다. 갈릴리 호수와 예루살렘 성벽을 표지로 하는 이 책은 군부대, 피란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반포됐고 일부 중고등학교에선 교과서로도 채택됐다. 어르신들에게 익숙한 개역한글 문체의 이른바 ‘쪽복음’(성서 66권을 한 권씩 쪼개놓은 책)이었다. 전후 물자 부족이 이어지던 1956년엔 당시 유엔군 총사령관이 자신의 전용기를 내줘 일본에서 성서 용지 묶음을 공수해오기도 했다.

성경이 교과서로도 쓰인 사연은 이렇다. 대한성서공회는 6·25 직전 정부의 새로운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라 성서 개정 작업을 완료했다. 새 철자법이 공표된 직후여서 이를 적용한 인쇄물로 학교에서 가르쳐야 했는데, 전쟁이 발발하자 인쇄시설 대부분이 파괴됐다. 외국에서 대한성서공회의 요청에 따라 보내온 한글 성경을 제외하고는 한글맞춤법통일안에 따른 책 자체를 찾기 어려웠다. 학생들은 의사였던 누가가 기록한 복음서를 통해 가난한 자, 멸시받는 자, 상처 입은 자를 위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수업 시간에 배웠다. 비록 피란지 천막 교실이었겠지만 열기만큼은 뜨거웠을 것이다.

‘너희는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라’(마 10:8)는 말씀은 오늘날 그대로 적용되고 있다. 민간인을 가리지 않는 러시아의 잔혹한 침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를 위해 대한성서공회가 뛰고 있다. 전쟁으로 성서가 동났다는 우크라이나 현지 이야기를 보도한 국민일보 미션라이프 기사가 촉매제였다. “페이지가 잘리거나 일부가 파손된 성경도 소중히 읽히고 있다”는 우크라이나성서공회 관계자의 멘트가 한국 교회 성도들의 가슴에 불을 댕겼다. 대한성서공회는 긴급 모금을 통해 우크라이나어로 된 요한복음 쪽복음과 더불어 신구약 전체가 담긴 성경을 제작해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우크라이나 국경 지대로 발송할 방침이다.

대한성서공회가 현지 선교사들로부터 제공받은 영상 등을 보면 어두운 대피소와 지하실에서 우크라이나 성도들은 시편 31편9절을 낭송한다. “여호와여 내가 고통 중에 있사오니 내게 은혜를 베푸소서”란 간구를 담은 다윗의 시다. 우크라이나성서공회 관계자는 “나날이 생존에 필요한 육의 양식인 빵과 함께 고난 가운데 희망을 전해주는 영의 양식인 성경을 보급하고 있다”면서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는 이 사역을 도와 달라”고 호소한다.

반세기 만에 원조를 받던 나라에서 원조하는 국가로 위상이 달라진 대한민국이다. 대한성서공회 역시 1979년을 기점으로 해외성서공회연합회의 지원 대상에서 벗어나 자립을 이뤘고, 이후 1000개 이상의 언어로 3000종 이상의 성서를 제작해 정치적 경제적 종교적 어려움을 겪는 나라들에 현지어 성경을 무상으로 기증하고 있다. ‘개판 오분전’을 기억하는 한국 교회의 정성이 포화 속 우크라이나에도 이어지길 기도한다.

우성규 종교부 차장 mainport@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