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동남풍의 가치

입력 2022-03-17 04:07

“동짓날부터 3일 동안 거센 동남풍을 빌려 오겠소!” 서기 208년 중국 양쯔강 적벽에서 조조의 80만 대군과의 결전을 코앞에 두고 제갈량이 주유에게 건넨 말이다. 수적 열세로 연합군이 위기에 몰린 상황. 제갈량도, 주유도, 조조도, 그 많은 책사도 겨울철 주풍이 북풍임을 모를 리는 없었을 터…. 어떤 연유에선지 제갈량은 동남풍이 며칠 뒤에 불 것이란 확신에 찬다. 그리고 약속한 날이 되자 정말로 따뜻한 동남풍이 불어오고, 연합군은 이를 이용해 적군을 불화살로 궤멸시킨다. 당시 제갈량은 중국과 우리나라 겨울철 날씨의 대표적 특징인 삼한사온(三寒四溫)을 잘 활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날씨의 패턴이 일정하게 반복되는 것은 아니다. 조선 중기 효종 2년(1651년) 삼학사였던 김상헌도 일찍이 “작년의 기후가 무척 추워 삼한사온이라는 이야기는 역시 믿기 어렵다”라고 글을 남겼다. 과거에도 현재와 같이 평소와는 다른 특이한 날씨가 나타날 때가 있었던 것이다. 마찬가지로 2000년 전 날씨도 그리 단순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로 예상컨대 제갈량은 기상에 대한 학식을 겸한 것을 넘어 위기 상황에 그 정보를 유연하게 활용할 줄 알았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발표된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제6차 보고서에 의하면 과거 어느 때보다 지금 현재 전 지구적으로 기후변화의 영향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빙하가 녹는 속도는 1950년부터 2000년 사이에 1.5~2배 가속화하고 있으며, 이로 인해 더 많은 강우와 강한 가뭄 등 극한 기상이 인류에 위협을 줄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최근 우리나라는 역대 최악의 겨울 가뭄과 산불을 겪으며 이를 체감한 바 있다. 가뭄과 산불 외에도 국지성 집중호우와 폭우, 극한 폭염 등 기후변화로 야기되는 이례적인 기상 현상은 앞으로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인다.

만약 이러한 오늘날의 기후변화가 일찍이 양쯔강 남안의 적벽에 모습을 드러냈다면 과연 제갈량은 동남풍을 빌려올 수 있었을까. 예년과 사뭇 다른 바람 속에 동남풍이 불 거란 전략적 확신이 오히려 역풍이 돼 돌아오진 않았을까.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제갈량은 단순히 날씨 현상 자체에 주목한 것이 아니다. 그것을 넘어 제갈량은 예측이 어려운 기상 현상을 분석해 어떻게 활용할지에 대한 ‘기상정보의 가치’를 발견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남풍의 가치를 알아본 제갈량의 혜안이 필요하다. 현대사회로 들어서면서 기상정보는 에너지, 항공, 도로, 철도, 농업 등 여러 분야에서 활용되고 있다. 특히 최근 환경·사회·지배구조(ESG) 경영에 대한 요구가 커지는 가운데 기상정보는 기후위기 시대 필수불가결한 요소다. 기후변화와 그 원인에 대한 기후정보뿐 아니라 다양한 분야로 기상정보의 활용도를 높이고, 탄소중립을 실현하기 위한 드넓은 안목과 통찰력으로 우리 앞에 놓인 기후위기를 지혜롭게 헤쳐나갈 때다.

박광석 기상청장